비밀의 장벽 너머, 인간을 탐구하다

장병호 기자I 2025.09.03 05:35:00

새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 펴낸 김초엽
인공피부 이식숍, 두 자아의 종족…
독특한 상상력으로 빚은 7개 단편
인간 내면의 감정·본질 파고들어
차기작은 장편…2027년 출간 목표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달력에 엑스 표를 치는 것. 그러면 지난 시간이 없어질 수 있을까.”

4년 만에 새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를 출간한 김초엽 작가. (사진=래빗홀)
세 번째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를 발표한 김초엽(32) 작가의 스마트폰 메모장에 적혀있는 짧은 문장이다. 최근 서울 용산구 한 카페에서 만난 그에게 평소에도 소설처럼 엉뚱한 생각을 자주 하는지 물었더니 긴말 없이 이 문장을 보여줬다.

김 작가는 “엉뚱함의 기준은 다를 수 있다.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라면서 “평소엔 아무 생각이 없지만, 작품을 쓸 때는 머릿속을 떠다니는 작은 생각의 조각을 적어둔 메모를 하나로 묶는다”며 환하게 웃었다.

SF장르 새 지평 열며 독창적 세계관 구축

김 작가는 한국 문학계에서 SF(공상과학) 장르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7년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과 가작을 동시에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소수자, 지구 환경, 참사 현장을 관광하는 다크투어리즘 등 다양한 소재를 독특한 상상력으로 풀어내며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 왔다.

‘양면의 조개껍데기’는 김 작가가 2021년부터 올해 4월까지 쓴 7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이다. 인공피부를 이식해주는 피부관리숍, 하나의 신체에 서로 다른 2개의 자아가 공존하는 종족, 사물의 목소리를 듣는 이들 등 이번에도 독특한 상상력으로 빚어낸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각각의 단편을 관통하는 공통된 주제가 있다면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김 작가는 “그동안 인간과 세계의 구조를 그리려고 했다면, 이번에는 인간 내면의 감정과 감각을 더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김초엽 작가 신작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 표지. (사진=래빗홀)
단편 ‘진동새와 손편지’에서 그 고민이 잘 드러난다. 소설 속 주인공인 외계인은 지구를 방문한 경험을 언급하며 “서로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지구인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지구인은 “원래 우리 언어는 불완전하다”며 “문자로는 마음을 온전하게 전달하지 못하니까 더 잘 전해보고 싶은 것”이라고 답한다.

김 작가는 “어릴 적 영국 드라마 ‘푸싱 데이지’를 인상적으로 봤다. 다른 사람과 접촉하면 그 사람을 죽게 하고, 반대로 죽은 걸 만지면 살아나게 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였다. 주인공의 로맨스도 ‘비밀의 장벽’을 사이에 두고 이뤄졌다”며 “아무리 가까워지고 싶고, 서로 이해하고 접촉하고 싶어도 넘어설 수 없는 비밀의 장벽이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다”고 언급했다.

후반부에 실린 단편 ‘고요와 소란’, ‘달고 미지근한 슬픔’, ‘비구름을 따라서’에 대해 출판사 인플루에션 측은 “인간 존재와 그 기반의 우주를 이해해보려는 노력의 흔적을 담은 ‘탐색 연작’”이라고 소개했다. 가상 시뮬레이션 세계 속 존재들, 삼투압 이론과 평행우주의 만남 등 다소 어려운 과학적 설정이 등장한다.

김 작가는 “그동안 독자들이 과학을 잘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 SF소설을 주로 썼는데, 이번 소설집 후반부 단편들은 과학적인 디테일이 좀 더 깊숙이 들어갔다”면서 “전반부와 후반부의 작품들의 분위기가 다른 점이 이번 소설집의 색다른 재미”라고 소개했다.

“AI, 언젠가 창의성 있는 결과물 만들 것”

4년 만에 새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를 출간한 김초엽 작가. (사진=래빗홀)
중학생 때 화학을 배우며 과학에 재미를 느낀 김 작가는 포항공대 화학과에 진학해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어릴 때는 사회성이 부족했는지 사람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사물과 우주 같은 것이 좋았다”면서도 “하지만 대학에 입학한 뒤 과학이 완벽한 형태의 학문이 아니라는 점, 과학 규칙도 결국 사람이 만들어내는 ‘잠정적인 진실’이라는 생각이 나를 소설가로 이끌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 내한한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인공지능(AI)에 대해 “AI는 과거의 것을 베낄 수 있지만 새로운 걸 만들어낼 수는 없다”고 말했다. 김 작가의 생각은 어떤지 물었다. 김 작가는 “지금 AI의 언어모델은 질문의 수준에 맞는 대답이 나오기에 혼자 창작물을 만들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면서도 “언젠가는 AI도 독창적이고 창의성 있는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답했다.

내년엔 김 작가가 발표한 소설의 영상화 작업 결과물도 만나볼 수 있을 전망이다. 차기작은 장편소설이다. 김 작가는 “데뷔 초창기엔 작가로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굉장히 빨리 작품을 썼는데, 요즘은 작품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집필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며 “다음 장편소설은 2027년 출간이 목표”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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