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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오롱(002020)그룹은 이 명예회장이 노환으로 이날 별세했다고 밝혔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다.
코오롱그룹은 이원만 창업주가 193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나서 해방 후 국내 최초로 나일론을 들여와 국내 섬유산업을 개척했다.
경북 포항 출신인 이동찬 명예회장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뒤 1957년부터 부친인 이원만 코오롱 창업주를 돕기 위해 경영에 참여했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1957년 국내 첫 나일론사 제조공장이자 코오롱의 전신으로 불리는 한국나일론을 설립, 현재 코오롱그룹을 일궜다.
이후 1977년 한구폴리에스텔과 합병하며 주식회사 ‘코오롱’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새롭게 출발했다. 이때부터 이동찬 명예회장이 전면 경영자로 나서며 본격적인 2세 경영을 시작했다. 1960~70년대 코오롱상사, 코오롱나일론, 코오롱폴리에스터 대표이사를 등을 지냈다.
이동찬 명예회장의 취임과 함께 코오롱은 지속적인 연구개발 투자를 통한 기술혁신에 속도를 냈다. 1973년 국내 최초로 자동차소재 사업에 진출했고 1980년대엔 필름·산업자재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해갔다. 1990년대 들어선 고부가가치 섬유제품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1993년 초극세사를 이용한 고도의 원사기술, 초정밀 공정관리 기술이 결집한 첨단 섬유소재 ‘샤무드’를 세계에서 3번째로 양산한다.
이 명예회장은 1982년부터 1995년까지 14년간이나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지내며 경총의 기반을 닦았고, 1989년에는 경제단체협의회 회장을 맡는 등 경제단체를 앞장서 이끌었다.
아울러 1970년 여자실업농구연맹 회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1980∼1990년대 대한농구협회장, 대한골프협회장 등을 지내며 한국 체육계 발전에도 한몫했다.
등산을 즐겼던 이 명예회장은 마라톤에도 남다른 관심을 둬 고교마라톤대회를 만들고, 코오롱 마라톤팀을 운영하면서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등 대표 선수들을 길러내는 데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금탑산업훈장(1982년, 2004년), 체육훈장 백마장(198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1992년, 2004년), 체육훈장 청룡장(1992년, 2004년)을 받기도 했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장남인 이웅령 현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고, 1997년부터는 경여에서 손을 떼고 등산과 낚시 등 여가를 즐기며 생활해왔다. 무교동 사무실에 출근해 취미인 그림 그리기로 소일하거나 그룹 산하 오운문화재단의 복지사업과 캠페인 등을 맡았다.
직접 그린 그림으로 1992년 고희전을 열고 지난 2001년엔 팔순 기념으로 자신의 그림 80여 점을 모아 전시회를 개최했다.
자서전으로 ‘벌기보다 쓰기가, 살기보다 죽기가’(1992년), 경영어록집으로는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1982년)가 있다.
코오롱그룹의 3세 경영 승계는 사실상 마무리됐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슬하에 1남 5녀를 뒀고 경영권은 자연스럽게 외아들인 이웅열 회장에게 넘어갔다. 이웅렬 회장은 코오로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주)코오롱의 지분 44.06%를 보유하고 있고 이동찬 명예회장이 8.4%를 보유하고 있다.
한편 코오롱그룹의 비영리 재단법인인 오운문화재단은 지난 1999년 시작한 ‘살맛 나는 세상’캠페인의 하나로 사회의 선행·미담 사례를 더 널리 알리고 격려하려고 이동찬 명예회장의 호인 ‘우정(牛汀)’을 따서 ‘우정선행상’을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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