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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나무판인 양 누런 바탕에 붉은 나선무늬뿐이다. 애써 형체를 만들려 했다기보다 그저 성질대로 있는 감정을 다 드러낸 듯하다. 가로 478.7cm, 세로 324.5㎝ 거대한 캔버스를, 거칠게 그어낸 붓선 만으로 채우고 있으니까. 배경설명을 듣는다면 분노처럼 휘감은 저 붓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강렬한 나선무늬가 독특한 이 연작을 시작한 게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던 때라니. 작가는 이 연작에 ‘술의 신’이란 뜻의 ‘바커스’(Bacchus)란 별도의 타이틀을 달았다.
미국작가 사이 톰블리의 ‘무제’(2005)가 지난 16∼17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필립스옥션 뉴욕경매에서 4164만달러(약 558억원)에 팔렸다. ‘바커스 시리즈’ 중, 지금껏 경매에 나온 출품작 중 두 번째로 큰 사이즈란다. ‘톰블리의 기념비적 걸작’이란 소개가 경매 전부터 붙어다니기도 했다.
톰블리도 톰블리지만, 이날 열린 경매에서 주목할 부분은 따로 있다. 낙찰률 98%. 물론 낙찰총액도 만만치 않다. 총 1억 3900만달러(약 1900억원)어치를 팔아치웠다니까. 사실 해외 경매시장에서 수시로 치고 올라가는 작품가나 낙찰총액은 웬만하지 않는 한 놀랍지도 않다. 다만 98%의 낙찰률은 경우가 좀 다르다. 출품한 미술품이 100점이라면 2점만 빼고 모조리 컬렉터가 가져갔다는 얘기니까. 장 폴 엥겔렌 필립스옥션 20세기·현대미술파트 공동대표는 “이번 뉴욕경매에서 기록한 1억 3900만달러는 필립스옥션 역사상 세 번째로 높은 판매고”라고 전했다.
비단 필립스옥션의 ‘반짝’ 결과 만인 것도 아니다. 지난 9∼10일 크리스티 뉴욕경매에선 16억 1587만달러(약 2조 1701억원)란 ‘새 기록’이 나왔다. 좀 특별한 경우이긴 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창업자 폴 앨런(1953∼2018)의 소장품을 경매에 붙인 거였으니까. 앨런의 출품작은 155점. 예상했던 10억달러(약 1조 4000억원)는, 60점을 먼저 내놔 100% 팔아치운 첫날 이미 넘어섰더랬다. 개인 컬렉션 단일 경매로 쓴 역대 최고액이었다. 이 경매에서 최고가 낙찰작은 조르주 쇠라의 ‘모델들, 군상’(1888·39.3×50㎝)이 차지, 1억 4920만달러(약 2010억원)에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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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이후에 세계 각 국가가 ‘글로벌 경제위기’로 신음하고 있다는데, 어째 미술시장은 잘도 피해 가는 분위기다. 하지만 물론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한국 미술시장 말이다. 크고 작은 지표들이 국내 미술시장에 연이어 ‘빨간등’을 쏘고 있는 거다.
◇62% 하락…조정기 든 미술시장, 컬렉션은?
이번 ‘경고’는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가 내놨다(‘2022년 3분기 미술시장 분석보고서’). “올해 국내 미술시장은 6월을 기점으로 완연히 하락세로 돌아선 모습”이라고 운을 뗐는데. 특히 7∼10월 국내에서 연 8차례 미술품 경매의 낙찰총액은 366억 7000만원으로, 지난해 같은 시기와 비교해 62% 감소한 것으로 분석했다. 이는 한창 코로나19 여파에 시달리던 2020년에 비해서도 18%가 감소한 것으로, 최근 3년간 집계한 3분기 낙찰총액 중 가장 낮은 결과라는 점에서 파장이 적잖다. 올 3분기 국내 메이저경매의 평균 낙찰률은 65.87%. 올해 상반기에 81%이었던 데 비하면 확연히 떨어진 수치다.
이보다 앞서 한국미술사감정협회가 집계한 올해 3분기 낙찰총액은 439억 4100만원. 지난해 3분기에 쓴 953억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46%). 낙찰률 역시 10%가량 빠졌더랬다. 출품한 6404점 중 3880점을 팔아 60.59%를 기록했는데, 지난해 같은 기간 낙찰률은 70.05%(출품수 8071점, 낙찰수 5654점)였던 거다.
분석기관마다 낙찰총액과 낙찰률에서 차이를 보이는 건 통계에 국내 경매사를 얼마나 포함시켰느냐에 따라 집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일관된 지표는 ‘하락세’다. 이 결과를 두고 연구센터는 “불황에도 버텨낼 수 있는 컬렉션 경매가 없고, 불안한 시장을 버텨낼 수 있는 블루칩 작가군이 한정돼 있다”는 점을 꼽았다. 컬렉션 경매는 차치하고서라도 “가장 활발하게 거래돼야 할, 1975년 이후 출생한 초현대작가군의 안정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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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불황이라 해도 작가에 대한 신뢰가 형성돼 있는 서구의 미술시장과는 상황이 다르다는 뜻이다. 서구 경매시장에선 최고 작가의 최고 작품이 나온다면 언제든 구매할 수요층이 늘 대기 중인데. 덕분에 뉴욕이든 런던이든 최고 매출을 매회 갈아치울 수 있는 거고. 한마디로 서구의 미술시장은 불황을 비켜갈 견고함을 갖췄지만, 국내 미술시장은 불황에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는 빈약함 그 자체란 얘기다.
그렇다면 국내서 미술품 투자는 멈추는 게 답인가. 연구센터는 적어도 시장이 만들어낸 가격에 속지 말라고 조언한다. “예술적·미술사적·제도적으로 검증된 가격이 결국 살아남을 것”이라며 “초현대미술작가들의 급격하게 상승한 작품가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건가는 지난 호황기를 이끌었던 작가군의 현재시장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했다.
◇김환기·백남준 앞세운 케이옥션 11월 경매…104점 102억원어치
‘조정기에 접어들었다’는 국내 미술시장에 대한 불편한 평가를 업고도 미술품 경매는 계속된다. 23일 케이옥션이 서울 강남구 신사동 본사에서 ‘11월 경매’를 열고 104점 102억원어치를 꺼내놓는다. 매달 하루 차이로 메이저경매를 함께 열었던 서울옥션은 29일 ‘홍콩경매’로 이달치를 대신한다.
케이옥션이 이번 경매에 대표작으로 내건 작품은 김환기의 ‘북서풍 30-Ⅷ-65’(1965·177.5×127㎝)다. 뉴욕시절 초반의 작품은 한국적 형체·색채를 반추상에 담아내던 캔버스를 좀더 ‘세계화’하는 시점에 나왔다. 색점·색면·십자구도 등 평생 고심해온 조형실험이 한 화면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후 김환기는 온전히 점으로만 화면 전체를 덮는 ‘전면점화’의 신화를 써내려가게 된다. 추정가는 20억∼40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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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의 ‘가을밤’(연도미상·40.9×53㎝)도 나선다. 화려한 꽃밭이 아닌 고즈넉한 푸른 달밤을 화면에 담은, ‘설악산 화가’의 드문 정취가 돋보인다. 추정가는 2500만원∼5000만원.
백남준의 ‘귀여운’ 미디어작품 2점도 눈길을 끈다. ‘아기로봇 1’(1991·37×21×55.5㎝)과 ‘아기로봇 2’(1991·72×16×77㎝)란 이름이 달린 작품들은 ‘스페인 아르코 2007’ 중에 열린 ‘백남준 타계 1주기 기념전’에 나섰던 작품이다. 추정가는 각각 2000만∼5000만원. 1964년 ‘K-456’을 시작으로 백남준은 한국의 대가족을 묘사하는 ‘로봇 작품’ 연작을 꾸준히 제작해왔던 터. 일찌감치 인간과 기계가 한데 엉켜 사는 AI시대를 내다봤던 ‘상징성’이 도드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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