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내밀한 문장, 수줍은 봉인 풀린다

한국일보 기자I 2007.08.29 11:40:00

영인문학관 내달 7일부터 文人편지전… 사랑·우정·애증 등 속마음 엿보여

▲ 김지하 시인이 이어령씨에게 보낸 올해 연하장.
[한국일보 제공] “사랑하는 여보, 초혜!… 오늘 아침 나절에 놀라움이 깃든 음성으로 머리칼을 헤쳐 보였을 때 나는 우리의 삶 23년을 순간적으로 떠올렸고, 부끄러운 듯 숨어있는 흰 머리카락들마저 대견하고 사랑스러웠소.” (소설가 조정래씨→부인 김초혜 시인ㆍ1985년)

“염치없이 보고픈 나의 정원… 엊저녁과 오늘밤의 불과 예닐곱 시간에 30여 매를 넘게 원고지의 공간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의 공로가 아닌가 싶다. 아니라면… 나를 떠나보내던 동대문 네거리에서 쓸쓸히 보였던 당신의 그 표정 때문인지도 모른다.”(소설가 박범신씨→부인 황정원씨ㆍ1972년)

▲ 황지우 시인이 2001년 은사 박상규씨에게 보내려 만들었던 연하장.
작품이 아닌 농밀한 연서(戀書)를 통해 만나는 작가의 내면이 낯설고도 친근하다. 내달 7~22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관장 강인숙)에서 열리는 ‘짧은 글ㆍ깊은 사연 문인 편지전-이광수에서 정미경까지’에서는 사랑 편지를 비롯, 가족 편지, 친구 및 문우(文友) 편지, 엽서ㆍ연하장 등의 코너로 분류된 작가들의 서한 270여 점이 전시된다.

이 문학관이 2003년 열었던 ‘문인 교신전’이 작고 작가의 편지를 위주로 한 행사였다면, 이번 전시회는 생존 작가의 편지로 무게 중심을 옮기면서 전시작 수도 대폭 늘렸다.

김동리, 김원일, 박경리, 박완서, 윤후명, 이제하씨 등 40여 명의 소설가, 고은, 박목월, 오세영, 오탁번, 천상병, 황지우씨 등 80여 명의 시인과 아동문학가, 극작가, 수필가, 평론가 등 문인들의 편지와 함께 화가 방혜자, 천경자씨, 음악인 장영주, 장사익씨 등의 서간도 볼 수 있다.

▲ 소설가 박범신씨가 1972년 당시 연애 중이던 부인 황정원씨에게 보낸 편지.
사랑 편지 코너엔 백석, 유치환 시인의 연서와 함께 화가 김병종-소설가 정미경 부부, 문효치 시인 부부의 왕복 서간이 전시된다. 여류 화가 정완교씨와 결혼한 이탈리아 화가 파올로 디 카푸아씨가 로마에서 보내온 동판에 뜬 연애 편지는 이색적인 전시품이다. 소설가 조흔파씨와 수필가 정명숙씨가 50년대 중반 파경을 맞을 당시 주고받은 편지도 있다.

가족 편지로는 시인 김남조씨, 소설가 손장순씨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 서정주 시인의 아들 승해씨가 부모님께 보낸 편지 등이 있다. 특히 손씨의 편지는 “너보다 앞서간 윤진은 불효하고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려무나”라며 손녀의 죽음에 상심한 아들을 위로하는 내용이어서 애틋하다.

엽서ㆍ연하장 코너에선 손바닥만한 상투적 지면을 돋보이게 만드는 작가들의 미적 감각을 만끽할 수 있다. 김지하 시인은 매화 그림을 곁들인 날렵한 붓글씨로 받는이의 새해를 축하했고, 황지우 시인은 은사를 위해 갱지에 물감을 칠해 손수 꾸민 연하장을 마련했다. 아울러 백남준씨가 문학평론가 이어령씨의 환갑을 축하하며 보낸 그림 엽서, 수필가 전혜린씨의 엽서 편지, 건축가 김수근씨의 마지막 연하장 등 희귀한 자료도 전시된다.

이번 전시회엔 시인이자 무용평론가 김영태씨가 지난달 작고하기 전 문학관 측에 기증한 수신 편지가 따로 진열된다. <25시>를 쓴 루마니아 소설가 버질 게오르규, 일본 노벨문학상 수상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이 한국의 글벗에게 보낸 편지도 관심을 끄는 전시물이다.

강인숙 관장은 “편지는 수신자 혼자서만 읽는 최고의 호사스러운 문학작품”이라며 “이전 전시회에 비해 밀도있는 사연을 담은 편지들을 선별했기 때문에 문학적 의미도 크다”고 말했다. (02)379-3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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