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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세계 최대 석유 수출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알리 알 나이미 사우디 석유장관의 말 한 마디에 원유시장은 물론이고 주식시장까지 들썩였다. 23일(현지시간) 미국 휴스턴에서 열린 IHS CERA 위크 글로벌 에너지 콘퍼런스에서 “산유량 감축(=감산)을 추진한다며 시간을 낭비하는 건 무의미한 짓”이라는 알 나이미의 발언이 전해진 뒤 국제유가는 4.6%나 추락했다. 물론 다음날인 24일 유가가 반등에 성공하긴 했지만, 그의 발언이 던진 충격파는 아직 완전히 사그러들지 않는 모습이다.
특히 서구 언론들이 파장을 키우고 있다. ”사우디가 감산을 거부하다”(뉴스앤월드리포트) 정도는 양반이다. “알 나이미가 살아나던 감산 기대를 짓밟았다”(마켓워치), “사우디가 미국에 던진 메시지: 비용을 낮추든, 원유시장을 떠나든 택일하라”(블룸버그), “사우디가 미국 셰일업체에 말한다: 너희들은 붕괴될 것이다”(포브스) 등의 기사 제목에서 보듯이 사우디가 마치 독불장군처럼 무르익은 감산 분위기를 깨버린 원흉이라거나 경쟁국가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식으로 보도되고 있다.
그러나 알 나이미 장관의 이날 발언을 뜯어보면(물론 그의 얘기를 액면대로 받아들인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시장논리대로 서서히 석유 공급과잉을 해소해 가겠다’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감산은 시간 낭비”라고 알려진 발언도 사실은 ‘산유국간 이해관계가 다 다르기 때문에 당장 감산에 합의하긴 힘들다. 따라서 감산부터 논의하느라 시간을 끌기보다는 산유량 동결과 같은 작은 행동부터 하자’는 뜻으로 이해된다. 실제 그는 “감산을 추진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건 무의미하다”라고 했고 “(러시아와 합의한) 산유량 동결로 원유 재고가 서서히 줄어들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자리를 함께 했던 압달라 엘 바드리 석유수출국기구(OPEC) 사무총장 역시 “동결조치가 성공적일지를 3~4개월 정도 살펴봐야 한다”며 우선 동결 이행후 상황을 봐서 감산 논의에 들어갈 수 있음을 시사했다. 만약 유가가 반등하지 못한다면 OPEC 정례회의가 예정된 6월2일이 감산 논의를 시작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또 알 나이미 장관은 “셰일오일을 포함한 새로운 방식의 원유 공급을 환영한다. 그 만큼 원유 수요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셰일과의 전쟁을 선포한 적이 없다. 우리는 시장점유율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며 고객 수요를 어떻게 맞출 수 있을지를 목표로 한다”라고도 했다. 물론 “비효율적인(=생산비용이 많이 드는) 원유 생산국이나 기업은 시장을 떠날 것”이라곤 했지만, 이 역시 셰일업계에 대한 ‘저주’라기보다는 시장논리를 설명한 것에 불과했다. 이 표현 직전에 “만약 효율적 시장이라면 산유량을 늘릴지 여부는 비용곡선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는 전제를 달았기 때문이다. 즉, 시장 효율성에 따라 한계 사업자가 시장을 떠나는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산유량 동결조치가 이행되면 더디더라도 공급과잉이 조금씩 줄어들 것이니 무리하게 감산은 지금 얘기하지 말자는 게 발언의 요지였던 셈이다. 더구나 지난 1970년대부터 계속된 감산 합의에서 번번이 다른 OPEC 회원국이나 러시아 등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던 트라우마도 한 켠에 있을 것이다. (☞참고: [증시키워드]산유량 동결, 세차례 약속 깬 러시아)
런던 ICE선물거래소 데이터에 따르면 최근 유가 반등 과정에서 추가적인 가격 상승에 베팅하는 투기세력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 16일 현재 브렌트유 선물에 대한 순매수(매수-매도)포지션은 28만4873계약으로 1주일만에 1만9541계약이나 늘었다. 앞으로 7400계약 정도만 더 늘어나면 5년만에 최고치를 경신하게 된다. 결국 사우디에 대한 과도한 비난은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서구 언론이나 이같은 투기세력이 주도하고 있다. 사우디를 다그치지 않더라도 최근 국제 원자재가격은 의미있는 반등세를 타고 있다. 특히 원유는 모든 산업용 원자재(industrial commodity) 가운데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 중이다. 알 나이미에 대한 실망보다는 향후 산유량 동결이 어떻게 이행되는지, 원유 수요는 꾸준히 살아날 것인지를 지켜보는 게 더 중요한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