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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 쓰라린 현실을 은폐하는 ‘달콤한 환상’

경향닷컴 기자I 2009.03.13 12:50:00

인도 빈민가 소년·소녀의 고통으로 얼룩진 삶
백만장자의 꿈·영원한 사랑의 신화에 가려져


[경향닷컴 제공]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지난해 로스앤젤레스에서 1주일 이상 유료 상영된 영화’(미국 아카데미상 후보작 기준) 중 정말 최고였을까.

지난달 열린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은 단연 <슬럼독 밀리어네어>였다. 이 영화는 후보에 오른 9개 부문 중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등 8개 트로피를 가져갔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프로스트 VS 닉슨> 등의 경쟁작을 제친 결과였다.

19일 한국 개봉을 앞둔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언론시사회를 통해 최근 공개됐다. 제작비 1500만달러 규모의 이 영화는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개봉돼 지금까지 12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배급사 측은 아카데미 특수를 업고 150개 이상의 스크린에서 상영을 시작한다는 계획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인도의 외교관인 비카스 스와루프의 첫번째 소설 를 원작으로 한다. 인도 뭄바이 빈민가 출신의 18세 고아인 자말은 2000만 루피의 상금이 걸린 퀴즈쇼의 마지막 문제를 앞두고 경찰에 연행된다. 경찰은 교수, 변호사도 도전에 실패한 퀴즈쇼에서 일자무식 고아가 승승장구한다는 사실에 의심을 품는다. 구타, 전기고문, 물고문이 이어지고 자말은 퀴즈를 맞힐 수 있었던 이유를 털어놓는다.

자말의 삶은 18세 소년이 감당하기 힘든 고통으로 점철돼 있었다. 가난하지만 흥겨웠던 아이 자말의 삶은 어머니가 종교 분쟁의 와중에 힌두교도들에게 맞아 죽으면서 엉클어졌다. 형, 우연히 알게 된 어여쁜 소녀 라티카와 함께 쓰레기터를 뒤지던 자말은 시원한 콜라를 건넨 아저씨를 따라 고아들이 모여있는 집단에 들어간다. 알고보니 이 아저씨는 고아들에게 동냥을 시켜 돈을 빼앗는 범죄조직의 두목이었다. 자말은 형과 함께 집단을 탈출하지만, 그 와중에 라티카와는 헤어진다. 자말은 라티카를 다시 보겠다는 일념으로 고단한 삶을 견딘다.

퀴즈쇼에 나온 문제는 우연히도 자말의 삶과 겹친다. ‘힌두교 라마신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이란 문제를 풀 수 있는 이유는 어머니가 살해당하던 현장에서 라마신 분장을 한 아이를 보았기 때문이다. 동냥을 위해 노래를 불렀기에 그 노래를 지은 시인을 알 수 있었다.

미국 개봉 당시 평단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시카고 선 타임스의 로저 에버트는 “영화의 보편적인 호소력에 힘입어 전세계 관객은 진짜 인도의 모습을 볼 것”이라고 평했다. “지옥 같은 삶에 대한 경쾌한 이야기”(뉴욕 타임스), “누가 이 영화를 보기 원하는가. 정답: 당신”(롤링 스톤) 등의 반응도 있었다.

반면 드물게 나온 혹평에서는 영화의 엉성한 이야기 구조, 들쭉날쭉한 감정선을 지적하기도 했다. “정교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뉴요커), “스토리에 문제가 있다. 결말부가 잘 처리돼 많은 관객이 좋아할 테지만, 그 이전 90분은 느릿하다”(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는 평이 나왔다.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Who Wants to Be a Millionaire)는 1998년 처음 방영된 영국의 텔레비전 퀴즈쇼다. 인기를 얻은 이 쇼의 포맷은 세계 각국에 수출됐으며, 영화 속에서는 인도판이 나온다. 점점 어려워지는 15개의 문제를 모두 맞히면 100만 파운드(약 20억원)를 가져갈 수 있다. ‘가난뱅이도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자본주의 세계의 신데렐라 신화가 퀴즈쇼를 통해 유포된다.

역설적이게도 자말은 퀴즈쇼에서 우승하기 위해 어린 시절의 끔찍했던 기억을 돌이켜야 한다. 현대의 텔레비전은 고통의 기억마저 상품화시키며, 슬프게도 현실의 진창을 벗어나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다는 점을 영화는 은밀히 지적한다.

영화는 인도의 변화한 현대상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의 슬럼가는 경제 발전에 힘입어 고층 빌딩숲으로 변했다. 자말의 형은 재개발과 관련한 폭력조직에서 일하고 있는 듯 보인다. 자말의 현재 직업은 텔레마케팅 회사의 차이 왈라(차 나르는 종업원)이며 이 회사의 고객은 인도인이 아닌 영국인이다.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고 현재까지 그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인도의 모습을 함축한다.

하지만 영화는 궁극적으로 돈을 벌고 사랑을 찾는 소년의 성공담에 방점을 찍는다. <올리버 트위스트>와 <신데렐라>를 혼합한 듯한 현대식 동화에 가깝다. 진흙 대신 그곳에서 피어난 사랑의 연꽃에만 눈길을 주는 격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흥행에 성공한 배경에는 ‘영원한 사랑의 신화’를 찬미하는 멜로드라마라는 데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멜로드라마라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달콤한 환상을 주는 동안 쓰라린 깨달음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지난해 최고의 영화로 추천하기엔 주저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현실이 팍팍하다 하더라도, 사탕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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