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현장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말들이다. 그만큼 경제흐름이 만만치 않다.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옮겨가면서 산업 현장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다. 수출과 내수 모두 빨간 불이 들어오면서 IMF 외환위기 이후 10년여만에 찾아온 위기라는 말을 실감나게 하고 있다. 모두들 내년이 더 걱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위기를 직시하되 희망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목소리도 높아가고 있다. 우리는 달러가 없어 부도 직전까지 몰렸던 나라를 수년만에 세계 5대 외환보유국으로 바꾼 저력을 발휘했다. 세계개발은행은 이를 '기적'이라고 평가했다.
기적은 또 있다. 전쟁 폐허를 겪은 세계 최빈국을 수십년만에 메모리반도체· LCD· 디지털TV· 조선 세계1위, 조강(철강)생산 세계5위, 자동차생산 세계6위의 10대 세계경제대국으로 탈바꿈시키는 힘을 보여줬다.
희망이 없으면 노력도 없다고 했다. 희망만 가지면 그곳에서 행복의 싹이 움튼다고도 했다. 위기가 불러오는 불안속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외환위기를 극복해 낸 경험이 축적돼있고, 10년전에 비해 크게 개선된 산업경쟁력과 기술력, 우수한 인재를 자산으로 보유하고 있다.
이제 그 자산을 써 볼 '기회'가 왔다. 위기는 곧 기회다. 희망을 이야기하고,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땀 흘린다면 위기극복이라는 알찬 열매가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편집자)
지난 1998년 새해, 구본무 LG 회장의 신년사는 비장했다. 구 회장은 "어떠한 고통과 희생을 감내해서라도 빠른 시일내에 과거의 관행과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생존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룹을 비상체제로 전환토록 했다.
이어 현금유동성을 확보하고, 생존을 위한 사업구조조정, 의식개혁에 적극 나서라고 강하게 주문했다.
97년부터 시작된 IMF 외환위기는 국내 기업들에게 준비없이 들이닥친 공포였다. 외환위기를 거치며 한국의 30대 그룹중 13개 그룹이 해체됐고, 대표기업 삼성전자 또한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10년여가 지난 2008년말, 또 다시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올해 4분기 국내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이 나타나고, 내년 경제성장률은 1~3%대로 내려앉을 것이란 전망이다.
기업들은 크게 위축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조사한 중소제조업체들의 내년 경영계획의 핵심은 '긴축경영'이었다. 10곳 중 6곳이 생산감축과 구조조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70%가 채용계획이 없고, 22.2%는 채용을 축소한다. 올해보다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기업은 9.7%에 불과했다. 대기업들도 이미 마른수건 쥐어짜기에 나섰다.
그러나 10년전 경험이 기업들에게 공포만 남긴 것은 아니다.
구본무 회장은 최근 계열사 CEO들에게 "위기극복과 지속경영을 위한 3不 원칙을 견지하라"고 지시했다. 구 회장이 제시한 3不 원칙은 ▲인위적인 인력구조조정은 없으며 ▲내년 투자를 줄이지 않고 ▲사회공헌활동비용도 줄이지 않는다는 것.
구 회장뿐 아니라 올 하반기 대부분 기업CEO들의 경영메시지는 위기와 함께 기회를 강조하고 있다.
◇`역발상 그리고 승자의 미소`
1998년, 전국의 땅값은 폭락했다. 많은 개인과 기업들이 현금 확보를 위해 헐값에 부지를 내놓았다. 이 와중에 신세계는 알짜 부지를 사모았다. 코스트코홀세일(옛 프라이스클럽) 사업을 매각해 마련한 1억달러와 카드사업 정리 등으로 확보한 자금을 대거 동원했다.
대형마트사업을 펼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다. 신세계는 백화점을 짓기 위해 사뒀던 핵심부지도 대형마트로 돌렸다. 순식간에 20~30개의 대형마트 부지를 확보했다. 경쟁업체들이 외환위기 파고를 넘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긴축경영으로 왜소해진 사이 신세계는 몸집을 불렸다. 외환위기 당시 1조5000억원에 불과하던 연 매출은 2007년 10조1000억원으로 늘었다.
삼성전자는 1997년 국내 최초로 양문형 냉장고를 출시했다. 경기에 경고등이 켜진 상황에서 내놓은 다소 생뚱맞은 하이엔드 제품이었다. 삼성전자는 `지펠`이라는 독립 브랜드를 적용했고, 프리미엄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 가격에서도 유사한 조건의 수입제품과 대응한 고가의 전략을 채택했고, 98년 10월부터 99년 12월까지 공격적인 광고 마케팅을 집행했다.
그 결과 98년 시장점유율 56%를 시작으로 2003년에는 점유율 62%까지 끌어올렸다.(제일기획 `불황기 마케팅전략 세가지 교훈`보고서)
올 하반기 세계적으로 불황의 그늘이 드리워지자 역발상 경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연구소와 기업들도 흥미로운 분석자료를 내놓고 있다.이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역발상 경영의 성과. `역발상 경영이 기업들에게 어떤 기회를 가져다 주는가`에 주목했다.
제일기획은 1997년 기준 국내 매출 1000위 기업중 광고비 집행 상위 200개를 대상으로 IMF시기(98 ~ 99년) 기업들의 광고비 투자와 그에 따른 2002년까지의 매출 추이를 분석했다.
제일기획은 "광고비를 10% 이상 늘린 기업은 IMF외환위기 당시나 회복기에 매출이 크게 증가한 반면 광고비를 줄인 기업은 매출이 소폭 늘거나 감소했다(그림 위)"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제일기획은 "극적인 매출 증대로 시장 판도를 바꾼 사례의 공통점은 역발상"이라고 주장했다.
LG경제연구원은 1990년대 미국 및 일본의 불황기, 2000년대초 IT버블붕괴 등 세계 경기침체기 성공한 기업과 실패한 기업을 분석한 뒤 "경기침체기 유동성 압박에도 애플 등 큰 그림을 갖고 미래를 준비한 기업은 호황기 비약적인 성장을 했지만, 컴팩처럼 단기처방 중심으로 대응한 기업은 실패했다"고 제시했다.(그림 아래)
◇"준비된 기업만이 미래를 가진다"
"준비되지 않은 기업만이 미래가 불안할 뿐이고, 준비된 기업에게 미래는 희망입니다. 우리는 준비된 기업입니다." 노영인 동양메이저 부회장이 임직원들에게 보낸 메시지다.
동양메이저는 최근 전북 동원레미콘을 인수했다. 올들어서만 700억원 가량을 투입해 7개의 레미콘 공장을 신설 또는 인수했다. 2005년 28개였던 레미콘공장은 47개로 늘었다. 골재사업에도 신규 진출했다. 건설경기가 침체인 상황에서 파격적인 행보다. 동양메이저는 "불황기에 적은 비용으로 투자를 확대하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불황기를 핵심사업 역량을 강화하는 기회로 활용하려는 기업이 늘고 있다. 이들은 적은 비용으로 핵심사업을 강화해 향후 경기회복기에 확실한 위치에 올라서겠다는 복안이다.
롯데는 두산의 주류 인수를 진행중이다. 평소같으면 최대 1조원의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두산 주류를 크게 낮은 가격으로 인수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롯데는 현 경기상황을 주류사업을 업그레이드할 찬스로 보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신규사업인 아울렛 2호점을 오픈하는 등 롯데의 유통 강화가 계속되고 있다.
유통 경쟁자인 신세계도 내년 국내와 중국에서 총 22~24개의 이마트를 오픈하는 확장전략을 유지한다. 현대백화점도 최근 부천 복합쇼핑몰을 2600억원에 인수했다. 올해 홈에버를 인수해 유통3위로 올라선 홈플러스 또한 113개 수준의 매장을 2010년까지 140개로 늘리고, 연 매출을 7조7000억원 수준에서 내년 10조5000억원으로 확대하는 공격경영을 밝혔다.
가구업체인 한샘은 최근 몇년간 다소 주춤했던 성장성을 극복할 찬스라고 보고 준비중이다. 이미 부엌 리모델링과 개별 인테리어 가구 판매에서 벗어나 인테리어 전 분야 원스톱서비스 판매에 나섰다. 내년 국내 인테리어업체나 건자재업체 인수에 나서는 한편 동남아 가구공장 설립을 검토중이다.
LS도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LS전선은 북미 최대 전선회사인 수페리어에식스를 인수한데 이어 자동차용 전장부품업체인 대성전기공업을 인수해 차 전장부품사업에 진출했다. 계열사 LS니꼬동제련은 반도체 재료 등으로 쓰이는 희유금속과 귀금속 생산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휘닉스엠앤엠을 인수했다. LS산전도 전력선통신(PLC) 업체인 플레넷을 인수했다.
`불황기=긴축`이란 등식도 곳곳에서 깨지고 있다. 설비와 R&D투자를 확대하고, 채용을 늘리는 기업이 나타나고 있다.
경기둔화로 감산에 들어간 포스코는 내년 올해보다 80%가량 늘린 6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혀 주목받았다. 제강·후판, 자동차강판 공장 신증설 등 생산능력 확충에 투입한다. LG그룹도 핵심분야에 대한 투자를 집중, 내년에도 올해 수준인 11조원 이상을 투입키로 했다.
기술력 확보에 대한 투자도 확대하고 있다.
한국산업기술협회가 국내 R&D투자 상위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내년 연구개발 투자계획을 조사한 결과, 64개사가 올해 수준 또는 그 이상의 자금을 투입하겠다고 답했다.
대기업뿐 아니다. 뼈 전문 신약개발업체인 오스코텍은 올해 미국 R&D센터를 개소한데 이어 향후 3년간 R&D에 800만달러를 투입키로 해 눈길을 끌었다. 오스코텍의 지난해 매출이 800억원대다.
오스코텍은 또 경기침체를 틈타 글로벌 바이오 핵심 연구인력을 손쉽게(?) 확보하는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R&D뿐 아니라 채용을 오히려 늘리는 기업도 눈에 띈다. 락앤락은 내년 1월부터 4회에 걸쳐 올해보다 50여명 많은 130여명을 신규 채용키로 했다. 락앤락은 내년에 30% 성장을 목표로 잡고 영업·마케팅·R&D 인력을 확충키로 했다.
올해 극심한 약세장이 연출되는 가운데에도 증시 상장을 강행한 LG파워콤은 15% 가량의 매출성장을 목표로 잡고, 4200억원의 설비투자와 100여명 규모 채용을 내년에도 이어간다.
어려울수록 직원들 기 살리기와 소비진작을 위해 성과보상을 서두르는 모습도 보인다.
삼성그룹은 하반기 생산성 격려금(PI, Product Incentive)을 예년보다 앞당겨 지급키로 했다. 통산 연초에 지급했으나 시기를 앞당겼다. 삼성은 PI와 PS(Profit Sharing, 초과이익분배금), 임원 장기성과급 등 1조원 가량을 연말연초에 풀기로 했다.
제일기획 마케팅전략본부 허원구 국장은 "강한 기업은 불황에 삼아남는 기업이 아니라 오히려 불황을 이용하는 기업"이라며 "불황에 움츠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역발상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아 공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김종년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최근 `불황기 기업대응전략` 보고서에서 4가지 맞춤형 전략을 제시했다.
우선, 재무유연성과 소프트경쟁력(브랜드, 디자인, 기술력 등)이 모두 양호하면 시장지배력 강화를 위한 M&A와 선행투자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재무유연성은 강하지만 소프프경쟁력은 취약한 그룹은 브랜드와 원천기술 확보를 위한 투자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제시했다.
또한 재무유연성과 소프트경쟁력이 모두 부족하면, 생존을 위한 재원확보가 최우선이고, 제휴 파트너를 물색하라고 권했다. 이외에 소프트경쟁력이 강한 그룹은 무형자산을 활용한 수익성 제고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