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이 11월 1일로 창립 80주년을 맞았다. 수송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하늘과 땅에 수송의 길을 새로 만들고 닦아 넓혀 놓은 한진그룹 조중훈 창업주와 조양호 선대회장의 리더십이 재조명되고 있다. 두 부자는 일평생 ‘수송보국(輸送報國)’을 신념으로 삼아 국가의 동맥 역할을 하는 수송 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선대 경영진의 뜻을 이어온 한진그룹은 글로벌 종합 운송 기업으로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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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혼란하던 1945년 당시 스물다섯 살이던 조중훈 창업주는 트럭 한 대를 장만하고 인천시 해안동에 ‘한진상사’ 간판을 내걸었다. 교통과 수송은 인체의 혈관처럼 한 국가의 정치·경제·문화·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기간 산업으로 우리나라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6·25 전쟁 직후 쑥대밭이 된 땅과 은행 부채만 남았지만 창업주는 그간 쌓아온 신용으로 2년 만에 전쟁 직전의 사세를 회복했다. 한진상사는 미 군수품 책임제 수송, 주월미군 군수품 수송 등을 도맡으며 회사를 키워나갔다. 1956년도에는 1인당 국민 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던 시절 7만달러에 달하는 계약을 미군과 직접 맺으며 수송 전문 회사로서 입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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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은 1970년대 들어 미 태평양 노선과 유럽 항로를 개척하며 국제항공사로서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1973년 미주로 향하는 태평양 노선에 보잉 747 점보기를 투입했다. 전 세계 최초로 점보기를 화물 노선에 투입함으로써 화물 수송 분야에 새 전기를 열었다. 대한항공은 1975년 매출액 1000억원을 돌파하고 흑자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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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훈 창업주는 ‘민간 외교관’으로도 활약했다. 1970년대 유럽 신생 항공기 제작사 에어버스의 항공기를 구매해 한국과 프랑스 외교에 도움을 준 일화는 유명하다.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개최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는 서울올림픽 유치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시스템 경영 선구자’ 조양호 선대회장
조양호 선대회장은 아버지가 일군 한진그룹을 본격적으로 성장시켰다. 미국 유학 중 귀국해 군에 입대, 육군 제7사단에서 비무장지대 및 베트남 파병 근무 등으로 36개월을 복무하고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다. 제대 직후인 1974년 대한항공 정비 담당 직원으로 입사해 현장에서 기초부터 철저한 경영 수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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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회장은 폭넓은 인맥과 해박한 실무지식으로 국제 항공업계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1990년대 항공 시장이 자유화되면서 조 선대회장은 각별한 신뢰를 지닌 델타항공, 에어프랑스, 아에로멕시코 CEO들과 함께 ‘스카이팀’을 출범했다. 2024년 말 기준 스카이팀은 18개 항공사가 모인 동맹체로 발전했으며, 전 세계 160개국 1000여개 도시에 취항하고 있다.
아버지가 했던 민간 외교관 활동도 이어갔다. 조 선대회장은 항공업계의 유엔(UN)이라 불리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서 1996년부터 집행위원회 위원을, 2014년부터는 전략정책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프랑스 루브르, 러시아 에르미타주, 영국 대영박물관 등 세계 3대 박물관에 한국어 안내 서비스도 성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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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그룹 관계자는 “한진그룹의 ‘한진’은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을 의미한다”며 “대한민국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등 모든 분야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국민기업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