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서가] 김승유 "역사·미래학을 보라…'사람'이 거기 있다"

오현주 기자I 2013.07.11 09:46:22

학교법인 하나학원 이사장
"''사기''서 인생 관조하는 방법을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서 제도의 포용을
''서기 2000년''서 미래 읽는 눈을 배워"

김승유 학교법인 하나학원 이사장(사진=김정욱 기자 98luke@)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어찌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꾸겠는가. 혹여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는 인생의 전환을 맞은 시점에 그 책을 만난 것이다. 그렇다. 책은 인생을 풍성하게 할 수 있다. 살을 붙이고 폭을 넓힐 수 있다. 그러나 뼈 아픈 회오를 남길 수도 있다. 산산이 부수고 가슴을 치게 할 수도 있다. 그 사람의 독서기를 듣고 살아온 삶과 그를 품어온 그릇을 가늠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지난 3일 서울 을지로 하나금융지주 본사에서 만난 김승유(70) 학교법인 하나학원 이사장이 그렇게 이른다.

사회 곳곳의 명사를 찾아 책과 연관된 인생, 책에서 비롯된 경영, 책을 통해 곧추세운 철학을 듣는 시리즈를 시작하며 그 첫 대상으로 김 이사장을 찾았다. 그는 지금 1회 졸업생을 낸 하나고등학교를 운영한다. 하지만 그에겐 여전히 금융계가 가깝다. 1965년 한일은행에 입사해 지난해 하나금융지주 회장직에서 퇴임할 때까지 일생을 금융업에서 보낸 그다. 잠시의 외도도 없었다. 인터뷰 시작 전 한사코 ‘제대로 읽은 책이 없다’며 손사래를 치던 그가 결국 동양의 고전부터 미래학의 역할까지 꿰뚫었다. 화두는 역사와 미래였다.

▲옛 인물의 삶이 곧 역사고 철학

“사마천의 ‘사기(史記)’엔 사람 사는 모든 일이 나오지 않는가. 뜻을 굽혀 남의 비위를 맞춘다는 곡학아세(曲學阿世), 나를 알아주는 친구라는 의미의 관포지교(管鮑之交), 사냥이 끝난 후에는 사냥개를 버린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까지. ‘사기’는 세상사는 일의 본질을 터득케 하는 기본이다.”

오래전 대학 졸업 즈음부터 틈틈이 펴본 ‘사기’는 지금껏 김 이사장의 일생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가 무엇인가. 동양사의 근간이자 인간학의 보고다. 동양뿐 아니라 세계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중국인 특히 한족의 시조부터 시작해 한나라 무제에까지 이르는 3000여년의 역사를 짚는다. 하지만 그에게 ‘사기’는 먼나라 남의 역사가 아니었다. “옛 인물, 그들이 살아온 얘기가 역사가 되고 철학의 일부가 된 것 아니냐. 거스르지 않으며 인생을 관조하는 방법을 배웠다. ‘사기’를 처세술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술’에는 되레 거부감이 있다.”

▲역사를 너무 몰랐다는 걸 알려주는 역사서

세상에 책읽기만큼 만만한 것이 있겠는가. 이젠 돌상에도 책 대신 마우스가 올라간다지만 특별한 교육이나 번거로운 절차 없이 잡을 수 있는 게 책이다. 책에서 멀어진다면 이유는 둘 중 하나다. 흥미를 잃었거나 여유가 없거나. “솔직히 책읽기와 거리가 있었다”고 말한 김 이사장은 뒤의 경우였다. “통독은 별로 해본 적이 없고 제목과 서문, 마지막 후기를 거쳐 중간 중간 흥미있는 부분을 건너뛰며 읽는 것이 전부”라고 했다. 그런데 얘기가 진행될수록 내용은 증폭됐다. 그는 기대 이상으로 많은 것을 꿰고 있었다.

최근 김 이사장이 읽고 있는 책은 대런 애쓰모글루 MIT 경제학 교수와 제임스 로빈슨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가 공동저술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다. “동서고금의 국가 흥망성쇠를 섭렵한 글을 썼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운을 띄운다. “역사에 대해 너무 몰랐구나 싶었다. 그리스·로마신화를 알지 못하고선 서구 어느 나라를 이해하기도 힘들겠다는 판단을 뒤늦게 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김 이사장이 특히 몰두한 건 제도다. 책은 오늘날 국가의 정치·경제적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으로 제도를 본다. 착취적 제도를 포용적 제도로 변화시키는 것이 알맹이다. 바뀌는 일은 쉽지 않다. 사회가 특정방식으로 조직된 이후엔 그런 경향을 지속하려는 관성을 보이는 탓이다. 하지만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책의 관점이다. “사회건 조직이건 핵심은 제도가 얼마나 많이 포용을 할 수 있는가다. 기득권층이 아닌 사람들을 어떻게 어느 정도로 끌어안는가에 따라 내일이 달라진다.” 결국 제도가 국가성패의 관건이 될 것이란 책의 주제의식은 김 이사장의 이슈와 맞닿아 있었다.

▲40년 전부터 이어온 ‘미래학’에 대한 관심

김 이사장의 주요 관심 중 하나는 미래학이다. 미국 남가주대에서 경영대학원을 다니던 1960년대 말경 접한, 허만 칸(1922~1983)이 쓴 ‘서기 2000년(The Year 2000)’의 미래구상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미래학의 태두라 할 칸은 당시 30여년 뒤 밀레니엄 시대에 펼쳐질 프레임워크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특히 계량화된 수치가 믿을 만하다. 얼마 전 유엔에서 펴낸 ‘2030 보고서’를 본 적이 있다. 똑같이 30년 뒤를 내다봤는데 유엔 보고서엔 차라리 허황된 진단이 많더라.”

그렇다면 김 이사장이 다른 무엇보다 미래학에 무게를 둔 이유는 무엇일까. “미래를 예측하는 건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금융계는 세계변화 속에서 우리 위치를 가늠하는 일이 중요하다. 비단 금융이 아니어도 앞을 내다보는 눈을 키울 필요가 있다.” 미래학이 전부를 말해줄 순 없지만 달라질 세상을 그리는 데 팁은 얻어내야 한다는 지론이다. 그렇다고 칸이 내다봤던 미래가 아쉽지 않은 건 아니다. “중국, 파키스탄, 인도네시아까지 언급하고 있으나 한국에 대한 얘기는 없어 섭섭하더라”고 했다.

미래학에 관한 김 이사장의 줄긋기는 톰 피터스에게까지 이르렀다. 앨빈 토플러, 피터 드러커와 함께 세계 3대 경영 석학으로 꼽히는 피터스. 그가 역대 최고 경영서라 할 ‘초우량 기업의 조건’ ‘경영혁명’ ‘미래를 경영하라’ 등을 내놓은 데는 통계를 비롯한 정교한 자료사용이 기반이 됐다는 거다. “금융업은 곧 확률통계”라며 김 이사장은 국내서 제대로 된 미래학이 나오지 못하는 문제도 꼬집었다. “‘나도 할 수 있다’로 끝낼 것이 아니라 세밀한 자료를 통해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야 된다’를 설명해내야 한다. 혼자만의 과제는 아니다. 팀워크가 문제되는 것이 이 지점이다.”

▲롤프 옌센 저서서 따온 ‘드림 소사이어티’

하나금융그룹에 ‘드림소사이어티’라는 행사가 있다. 이른바 지식경영을 해보자는 취지다. 정기 조찬강연회로 운영된다. 2002년 하나은행에서 시작했으니 10년을 넘겼다. 그룹 계열사와 제휴사가 교류를 통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교양과 지식을 넓히자는 것이 목적. 한 달에 한 번꼴로 연 10회 정도 연사를 초청하고 그룹 임원들이 모여 강의를 듣는다. 그간 다녀간 연사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성근 고양원더스 감독 등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를 아우르는 명사들이 초청됐다. 이뿐인가. ‘적진’의 어윤대 전 KB금융지주 회장까지 강연자로 세웠다.

행사명 ‘드림소사이어티’의 어원이 궁금했다. 김 이사장이 그 에피소드를 귀띔했다. 행사를 그룹에 제안한 후 명칭을 고심하던 김 이사장이 어느 날 서점에 들르게 됐다. 그러다 세계서 가장 큰 미래문제연구집단인 코펜하겐미래학연구소장을 지낸 덴마크 미래학자 롤프 옌센의 저서 ‘드림소사이어티(Dream Society)’를 발견한 것. “우연히 서점에서 만난 책이다. 눈에 들어온 대목이 있었다. ‘위대한 소설가가 이야기를 상상해내듯 경영의 미래 역시 상상하는 것이다.’ 그 내용이 마음에 들어 저자의 허락도 안 받고 책제목을 그대로 행사명에 써버렸다.”

한바탕 호방한 웃음 끝에는 뼈를 심었다. “결국 지식경영이구나 싶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잘 조직하고 다시 사회에 환원하는가가 미래경영의 관건이란 생각을 했다.” 정보사회의 뒤를 이을 ‘꿈꾸는 사회’의 청사진. 역사를 발판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시각을 키우자는 건 김 이사장이 한결같이 이어온 ‘이즘’이다.

김승유 학교법인 하나학원 이사장(사진=김정욱 기자 98luke@)


▲“결국 사람이다”

김 이사장은 요즘 온통 ‘학교와 학생’에게 신경이 뻗어 있다. 인터뷰 직전엔 지난밤 아르바이트로 지친 한 졸업생이 보낸 문자 얘기가 한참 이어졌다. 금융인과 학교법인인으로 있을 때의 차이는 크다. 우선 “불안한 것이 없어졌다”고 했다. “예전엔 은행이 거의 철밥통으로 인식됐다. 이젠 아니다. 굉장히 리스크가 큰 직업이 됐다. 환율·펀드·금리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다. 당장 영업에 영향을 받는다. 국내 국외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부담감에서 벗어나 이젠 편해졌다지만 “점점 어려워지는 때에 물러나 후배들에게 미안하다”는 소회는 피해가기 어려운 모양이다.

감상도 잠깐 다시 학교이야기다. 그에게 학생들은 에너지를 만드는 동력처럼 보였다. “1회 졸업생에 대한 애정이 크다. 그 아이들의 졸업식에서 ‘절대로 좌절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윈스턴 처칠이 2차대전 중 옥스퍼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했다던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를 떠올렸다. 전혀 다른 상황 아닌가. 그래도 왠지 그 절박함이 닮은 듯했다.

문득 그의 역사와 미래엔 담긴 그림이 궁금해졌다. 답은 힘들이지 않고 나왔다. 사람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론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다. 과거도 그렇고 미래도 그렇고 백성의 마음을, 왕의 마음을, 고객의 마음을, 직원의 마음을 어떻게 잡아내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는 거다. “결국 사람이다. 가령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갖고 일하는가는 분명 차이가 있다. 시키는 것과 직접 하는 건 다르다. 스스로 하려 들게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 아니냐. 물론 승자가 살아남는 게임이지만 사회적으로 배려할 수도 있다. 그러니 패자부활전도 있는 거다. 사람을 배려하고 경영하는 일이 역사와 미래의 요체가 돼야 한다.”

▲지금 살게 하는 그것이 바로 철학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사회현상을 외면하지 말자’가 김 이사장의 절대 각론이 된 것은. 사실 언제는 중요치 않다. 저소득층 자녀에게 공부방을 만들어주고 노인요양을 위한 방법을 찾고 다문화가정과 저출산·입양문제 등에 조직차원에서 마음을 쓰도록 독려한 건 누가 떠밀어 한 일이 아니다.

김 이사장은 지난해부터 서울대에 초빙교수로 강의를 나간다. 그런데 질문도 많고 까다로운 학생들이 유난히 강의 끝에 환호를 보내는 날이 있단다. 다름 아닌 사회의 부조리함을 많이 지적한 날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사회를 흔들었던 것도 그 이유 아닌가. 누군가 나서서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지적해주기를 바라는 거다.” 그 소통구조가 여전히 막혀 있다는 얘기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학생들이 마치 숨통이 터진 듯 열광했다는 말도 군더더기였을 거다.

경영철학 혹은 운영철학을 따지듯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지금 그 자리에서 김 이사장을 살게 하는 그 자체가 철학이었다. 이 모두를 책 한 권에 모아놓으면 어떨까 잠시 생각하다가 회고록을 집필할 의사는 없는지 물었다. “회고록은 아니다. 다만 금융의 역사를 한번 짚어보고 싶은 생각은 있다. 아무도 미처 기록하지 못한 것을 기록해야겠다는 사명감은 있다.”

▲김승유 이사장은…

지난해 3월 하나금융지주 회장직에서 공식퇴임하면서 47년 금융인생을 접었다. 1997년 하나은행장을 맡으며 15년 동안 하나금융그룹을 이끌어왔던 김 이사장의 가장 큰 업적은 2010년 외환은행 인수다. 결과적으로 강3 약1 체제였던 금융업계 지도가 빅4 체제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 그 이전 충청은행(1998), 보람은행(1999), 서울은행(2002)을 줄줄이 인수·합병하면서 일개 군소은행에 불과했던 하나은행을 국내 대표은행으로 부상시켰다. 퇴임 후에도 그가 완전히 떠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없을 정도로 그의 자리는 공고했다. 하지만 ‘사회공헌에 남은 인생을 바치겠다’는 소신을 지키고 있는 중이다. 지난 4년여간 수행하던 미소금융중앙재단 이사장직도 내려놓고 현재는 하나금융이 설립한 하나고등학교 이사장직만 맡고 있다. 1943년생으로 경기고, 고려대 경영학과, 미국 남가주대 경영대학원을 졸업, 한국 대표 금융 CEO로 평생을 지냈지만 작가 김훈·정호승의 역사문화기행에도 따라나설 만큼 스펙트럼이 넓다. 그래도 책보단 차라리 미술이다. 화가 김환기의 그림을 좋아한다. 요즘은 수십 번의 셔터를 눌러 단 한 장을 건져내는 사진찍기에 몰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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