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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뉴스가 영화보다 더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 ‘모범택시’나 ‘범죄도시’ 같은 영화를 보며 과장을 넘어 ‘에이, 너무 심하게 표현하는 거 아니야’라고 황당해했는데 그것이 사실이고 이렇게 되는 동안 아무도 어려운 상황에 처한 내 이웃의 아픔을 살펴봐주는 곳이 없었다는 현실에 그저 막막하고 가슴이 미어진다.
영화 콘텐츠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단순히 액션 때문이 아니다. 사적 보복이 주는 카타르시스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담겨 있다. 결국 통쾌함보다 허탈함을 느낀다. 정의가 공권력에 의해 구현되지 못하니 국민은 허구 속에서라도 정의를 찾는 것이다.
공권력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마지막 안전망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공권력은 정치의 소용돌이에 갇혀 있다. 정치권은 검찰개혁이니 수사권 조정이니 하며 권한 다툼을 벌이지만 그 싸움의 끝에서 국민이 얻는 것은 오직 불안과 무력감뿐이다. 그 사이 서민은 마약과 보이스피싱, 금융사기, 조폭, 인신매매라는 끔찍한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다.
캄보디아와 동남아 지역에서 한국 청년들이 납치돼 감금당하고 심지어 장기적출 대상이 됐다는 소식은 충격을 넘어 절망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범죄는 이미 수년 전부터 해외 언론과 영화, 다큐멘터리에서 ‘취업을 미끼로 한 인신매매·장기밀매’가 반복적으로 경고돼 왔고 국제범죄 전문가들은 동남아가 ‘사람 거래의 허브’가 되고 있다고 수차례 지적했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외교부는 ‘여행주의’ 문구 몇 줄로 책임을 대신했고 경찰과 국정원은 서로의 관할이 아니라며 사건을 미뤘다. 어느 수사기관도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았다. 위험이 예견됐음에도 방치한 결과 결국 한국 국민이 희생됐다. 이것은 단순한 시스템의 실패가 아니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공권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 것이다. 직무유기다.
지금의 공권력은 국민보다 정치의 눈치를 본다. 정치권의 권력 다툼 속에서 수사기관은 본래의 임무를 잃었다. 정권 관련 사건에는 수십 명의 수사 인력이 투입되지만 서민범죄나 실종사건은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방치한다. ‘유권 보호, 무권 무시’다.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연간 수조원, 마약사범은 10년 새 세 배 이상 늘었다. 그 사이 청년층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해외 취업에 속고 서민은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잃는다. 하소연해 봐도 메아리는 없다. 이것은 단순한 범죄 증가가 아니라 공권력의 방기다. 국가가 제 기능을 잃으면 범죄는 언제나 그 빈틈을 파고든다.
예견된 범죄를 막지 못한 정부기관, 경고를 외면한 정책 결정자, 국민의 생명보다 정치적 계산을 앞세운 이들에게 분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국민의 생명 앞에서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 공권력은 어디에 쓰는지, 정작 국민의 안전을 놓친 그 대가를 국민이 치르고 있다. 공권력의 책임이 모호하면 정의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법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존재 이유다.
이제 구호로서의 검찰개혁은 논외이고 국민의 삶을 지키는 공권력 재설계가 필요하다. 그 핵심은 정치적 사건에서 벗어나 오직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민생수사처(民生搜査處) 창설이다.
이 기구는 보이스피싱, 마약, 인신매매, 장기적출, 사이버·금융사기, 조폭 등 서민의 실생활을 파괴하는 범죄에 집중해야 한다.
외교부·경찰·검찰·국정원·금융감독원·관세청을 통합해 국내외 정보를 한데 묶고 실시간 대응이 가능한 체계를 갖춰야 한다. 외국 대사관에는 ‘국민보호수사관’을 상주시켜 국제범죄가 발생하면 즉시 개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해외 대형 범죄에 대한 대응 ‘델타포스형 기동대’도 창설해야 한다. 해외에서 우리 국민의 납치, 인질, 테러 또는 위험지역 철수 등을 다룰 만한 역량을 갖춘,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기동부대의 운영이 글로벌 시대에 필수적인 해외형 공권력이다. 수사뿐 아니라 피해자 보호와 회복 지원까지 통합하는 ‘수사 후 복지형 공권력’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치는 언제나 ‘국민을 위한 개혁’을 외치지만 정작 국민이 범죄로 고통받을 때 국가는 보이지 않는다. 국민이 위험할 때 공권력이 침묵하고 정치가 위험할 때만 번개처럼 움직이는 나라, 이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정치적 사건에 투입된 공권력을 사건의 빠른 해결과 함께 조속히 대국민 보호형 공권력으로 전환해야 한다.
국민이 밤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해외에서 납치 걱정 없이 일할 수 있으며 보이스피싱 전화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드는 것이 국가의 첫 번째 의무다. 예방과 대비에 철저한 공권력은 시대의 요청이다. 그리고 그 책임의 교훈 위에 비로소 국민을 위한 진짜 공권력이 세워질 수 있을 것이다. 국민 모두 잊지 말자. 누가 나를 위하는 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