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상헌 산업에디터 겸 소비자생활부장] 이랜드 박성수 회장의 성공스토리는 듣는 이들을 가슴 뛰게 한다. 28살이던 1980년 이화여대 앞에 2평짜리 보세의류 가게를 연 것을 시작으로 90년대 중반에 이미 매출액 5,000억원을 넘어서는 등 초고속성장을 일궜다. 이 과정에서 박회장은 철저한 은둔경영과 독특한 기독교적 기업문화로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의류시장에 불황이 몰아닥치고 IMF 외환위기가 터지며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을 맞는다. 직원들이 하나둘 회사를 떠나고, 창고에는 재고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박회장은 구조조정의 칼을 빼든다. 28개의 계열사를 8개로, 사업부 역시 72개에서 51개로 대폭 줄였다. 3,200백만 달러의 외자유치에도 성공하며 회생의 발판을 마련했다.
한고비를 넘긴 박회장은 2000년 3월 대내외에 ‘지식경영’을 선포한다. 다시 도약하기 위한 혁신의 키워드로 지식경영을 선택한 것이다. 성과관리 개념을 도입해 사업부, 팀, 개인별로 성과를 측정하기 시작했고, 직원들의 업무 노하우를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공유해 높은 호응을 얻었다. 이후 3년간 뼈를 깎는 고통을 견뎌낸 이랜드 경영진과 직원들은 2003년 봄 이랜드의 완벽한 부활을 알렸다. 당시 회사 안팎에서는 ‘이랜드의 혁신 1000일’이 회자됐다.
이후 1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이랜드는 자산규모 10조원의 거대기업으로 발돋움했고, 국내를 넘어 중국, 미국, 유럽, 동남아 등 세계 각지로 진출해 비즈니스 영역을 넓혔다. 하지만 덩치가 커진 만큼이나 나쁜 뉴스도 끊이질 않았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자금난 소식이 연일 흘러나오고 있다. 마치 20년 전의 위기 모습이 그대로 옮겨온 듯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물론 이랜드 역시 그 때처럼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얼마 전 중국사업에서 캐시카우 역할을 했던 의류브랜드 티니위니를 처분한데 이어 최근에는 그룹 핵심인 외식과 유통 관련 사업의 지분 매각에도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이랜드 위기의 본질은 과도한 몸집 불리기에 따른 급격한 부채 증가다. 티니위니를 팔기 전 부채율이 300%를 넘겼고, 지금도 24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더 이상 방치하면 위험해질 것이라는 신용평가 기관들의 경고에 부랴부랴 사들였던 브랜드들을 M&A 시장에 내놨다. 지분 매각에 성공하면 부채비율을 크게 낮출 수 있지만 여의치 않으면 당분간 자금난 꼬리표를 떼기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랜드식 혁신이 다시 필요한 상황이 됐다. 지식경영을 바탕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던 모습을 다시 연출하지 못하면 더 큰 위기를 맞을 수 있다. 2003년 위기 극복 후 외형을 키우느라 혁신을 소홀히 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랜드 혁신의 상징인 지식경영의 힘은 묵묵히 현장을 지키는 직원들한테 나왔다. 그들이 하나하나 쌓아올린 업무 노하우과 영업방식이 오늘의 이랜드를 일군 원동력이 됐다. 결코 현란한 M&A 테크닉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