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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파워] 김홍희 관장 "통했다…섬세한 리더십"

김인구 기자I 2013.11.15 09:44:29

서울시립미술관 부임 후 시스템확립 주력
영화·공예로 발 넓히고 제3세계 미술 접근
자판기 하나 옮길 때도 공무원 승인 필요
뚝심있게 진행… 절실하니 설득되더라
엄마같은 리더십, 서두르지 않는 리더십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사진=한대욱 기자 doorim@)
[이데일리 김인구 기자] “미술관 내 음료수 자판기를 3m 옮기는 데 1년이 걸렸다. 내가 생각하는 여성 리더십의 장점이란 이처럼 인내심을 갖고 조금씩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지난해 초 김홍희(65) 관장이 새로 부임하기 전만 해도 서울시립미술관은 소위 ‘대관전시’가 많은 미술관이었다. 품이 많이 드는 자체 기획전보다는 크고 유명한 작가의 전시에 미술관을 빌려주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김 관장은 시립미술관이야말로 시민의 것이라는 기본을 잊지 않았다. 부임 초기부터 ‘포스트 뮤지엄과 탈장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세우고 지난 2년간 보이지 않는 변화를 이끌어왔다. 김 관장의 소신에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던 서울시 공무원들도 이제는 김 관장의 팬이 됐다. ‘노르딕 패션-북유럽 건축과 디자인’ 전이 한창인 서울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김 관장을 만났다. 그는 “직원들을 자식처럼 대한 게 잘 받아들여진 것 같다”고 말했다.

△관행 깬 ‘포스트 뮤지엄’과 대중 끌어들인 ‘탈장르’

올해 서울시립미술관이 진행한 전시 가운데 가장 눈에 띈 건 ‘팀 버튼’ 전이었다. 이 전시에는 근래 보기 드물게 많은 관람객이 몰렸다. 50만명이 넘었다. 소위 ‘대박’을 터뜨렸다.

“근래 가장 관람객이 많이 든 건 사실이다. 아마도 대중의 욕구를 반영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부 마니아층을 위한 전시가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나이와 성별을 초월해 많은 관람객이 다녀갔다. 유명 작가의 클래식 작품이 아니라 탈장르를 해보겠다는 애초의 의지를 어느 정도 반영했다고 생각한다.”

김 관장이 말하는 ‘포스트 뮤지엄과 탈장르’란 그가 줄곧 견지해온 서울시립미술관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지향점이다. 탈장르는 순수미술만 하는 게 아니라 영화·공예 등 컨텍스트적 시각으로 다양하게 접근하는 것이다. ‘팀 버튼’ 전이 바로 그런 맥락의 일환이다. 샤갈과 르누아르도 필요하지만 이런 대중적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포스트 뮤지엄은 다른 말로 ‘비욘드(Beyond) 뮤지엄’이라고 할 수 있다. 공식처럼 받아들여지던 정체된 전시 관행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동안의 큐레이션 방향이 미국과 유럽 중심이었다면 그것을 제2, 3세계나 비서구미술 쪽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내년 2월 16일까지 여는 ‘노르딕 패션’ 전 역시 그 결과다. 헬싱키에서 활동하는 독립 큐레이터 안애경 소노안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여 미술관을 새롭게 꾸몄다.

“그럼 얼마 전에 했던 ‘고갱’ 전은 뭐냐, 탈장르라지만 결국 같은 것 아니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탈장르를 한다고 해서 기존의 유명작가 전시를 도외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제3세계 미술에 좀더 눈을 떠보자는 취지다. 사실 ‘고갱’ 전은 전임 관장의 추진했던 마지막 프로젝트였다.”

얼마 전에는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미술관을 개관하면서 처음 생각했던 미술관의 골격을 완성했다. 서소문동 본관은 글로벌아트, 남서울미술관은 공예디자인, 난지창작스튜디오는 신진작가 육성, 그리고 북서울미술관은 커뮤니티와 공공미술에 초점을 맞춰 지역별로 전문화했다. “내년엔 위탁하던 미디어비엔날레를 직영체제로 바꾼다. 총괄감독을 우리 손으로 직접 뽑는 것이다. 또 ‘글로벌 아프리카’ 전과 아카이브 구축도 추진할 계획이다.”

△음료수 자판기, 투명 유리문…작은 일부터 조금씩

지금은 전시기획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처음부터 수월했던 건 아니다. 김 관장은 거의 모든 일에서 기존의 관행과 싸워야 했다. 무엇보다 어려운 건 섣부른 변화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미술관 담당 공무원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한번은 미술관 차량 출입구를 반쯤 막고 있는 음료수 자판기를 안쪽으로 옮기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의외로 만만치 않았다. 자판기 하나 옮기는 데에도 수많은 서류와 승인이 필요했다. 3m 안쪽으로 이동시키는 데 1년은 걸린 것 같다. 그러나 이를 뚝심으로 관철하고 나니 관계자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전시동 오른쪽 사무동 내 3층에 있는 관장실 출입문을 투명한 유리문으로 교체한 것에도 김 관장의 세심한 리더십이 작용했다. 전에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두꺼운 철문이었다. 다른 사무실 문도 마찬가지였다. 김 관장은 소통을 다루는 미술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과감하게 문을 바꿔 달았다. 처음엔 안이 빤히 보이는 문에 어색해하던 직원들도 차츰 익숙해졌다. 관장실의 문턱이 낮아지고 직원들은 심리적으로 훨씬 가까워졌다.

“상호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했다고나 할까. 담당 공무원이 수시로 바뀌는 바람에 공든탑이 무너지기도 했다. 그러나 오픈마인드로 머리를 맞댔다. 남편이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한 터라 그들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있는 것도 도움이 됐다. 그런 노력으로 올해 깎였던 예산이 복원됐다. 절실하니까 설득이 되더라.”

김홍희 관장(사진=한대욱 기자 doorim@)
△‘모성적 섬세함’이 여성리더십

현재 미술계에는 여성 리더 전성시대가 이어지고 있다. 2011년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이어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이 임명됐고 한 달 뒤 정형민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부임했다. 국·공립 ‘빅3’가 모두 여성인 셈이다. 특히 김홍희 관장과 정형민 관장은 이화여고 4년 선후배 관계이기도 하다.

“주위에선 ‘여성 관장의 시대’라고 하더라. 과거 가부장적 시대에서 높은 자리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이젠 여성도 잘하면 자신의 분야에서 얼마든지 리더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시대적인 변화다. 젊고 유능한 여성 큐레이터들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마당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김 관장이 꼽는 남성보다 유리한 여성 리더십은 모성적 섬세함이다. “리더십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유리한 점은 아주 많다. 우선 섬세하다. 나의 경우 집안살림을 하듯 예산을 집행하려고 한다. 습관적으로 써서 손실이 생기는 걸 미연에 방지한다. 미술관 야외마당의 조각품들도 얼마 전에 세웠다. 시청 쪽에서 진입할 때 보이는 서울시립미술관 간판도 새로 달았다. 남들은 별것이 아니라고 할지 모르나 그런 작은 변화들이 모이고 모여서 큰 변화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직원들이 자식뻘 나이라서 엄마처럼 대했다. 때론 엄한 시어머니처럼, 때론 따뜻한 친정엄마처럼…. 변화를 위해 갑자기 너무 세게 가면 반발에 부딪치지만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땅따먹기’식으로 어느새 그 일이 이뤄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여성은 그동안 남성에 비해 ‘타자’였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억압 속에 있던 타자에 관심이 높다. 내가 제2, 3세계 미술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30대 초반에 늦깎이로 백남준 선생의 비디오아트를 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이제 와서 무슨 예술이냐’라는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젠 이게 소위 말하는 ‘대세’이자 전반적 트렌드가 됐다. 내가 생각하는 여성 리더십에서 페미니즘은 양날의 칼이 됐다.”

△“미래는 에코 리더십”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던 김 관장이 늦게 미술에 입문하고서도 중책을 맡을 수 있었던 건 백남준과의 인연이 컸다.

“1980년 ‘키친’이라는 아방가르드 퍼포먼스에서 백남준 선생을 처음 만났다. 레코드판을 깨고 바이올린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보다가 깨진 조각들을 주워 모아 사인을 받은 게 인연이 됐다. 1992년 귀국하고 1995년에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으로 국내에 첫선을 보인 미디어아트 기획전에서 백남준 선생을 도와 진행했다. 당시 내가 늦게 미술을 시작하자 주변에선 괜한 일 한다고들 했지만 개의치 않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때의 현장 경험이 나에겐 큰 자양분이 됐다.”

남다른 길을 걸어온 때문인지 김 관장은 미술품 거래시장의 역할이나 양도세에 대해 매우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미술품 거래는 투명해야 하고 제작과 유통이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 우리는 아직 미술품을 사는 데 익숙하지 않은데 창작만 해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요즘 각종 스캔들 때문에 컬렉터들이 많이 움츠리고 있지만 풀려야 한다. 이런 점에서 작가·컬렉터·비평가·딜러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양도세 과세도 마찬가지다. 김 관장은 기본적으론 “실시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일부에서 입버릇처럼 얘기하듯이 보호만 할 단계는 지났다. 이미 10년도 넘게 보호해 왔다. 자산가치로 인정하고 다른 경제활동과 마찬가지로 취급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김 관장이 생각하는 미래의 리더십은 무엇일까. “인생 선배이자 미술계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다. 큰 목표를 세우고 야심차게 행동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조바심을 내지 말고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그러면 어느새 바라던 일의 결과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을 것이다. 결국 미래의 리더십은 여성만을 따로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전 지구적 공생과 글로벌리즘이 필요하다. 여성의 시각을 넘어서는 포스트 페미니즘, 에코(eco) 리더십이어야 한다.”

김홍희 관장(사진=한대욱 기자 doorim@)

△김홍희 관장은…

‘늦깎이’로 시작해 서울시 예술을 대표하는 시립미술관장에 오른 미술계 대표 인물이다.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결혼 후인 30대 초반에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해외 주재 한국문화원 담당관이던 남편을 따라 미국 뉴욕, 캐나다 몬트리올 등지를 다니며 미술대학을 다시 다녔다. 귀국해서 홍익대 미술사 박사과정까지 마친 후 1995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큐레이터로 현장에 데뷔했다. 1980년대 미국 유학 때 만났던 백남준과의 인연이 계기가 됐다. 이후 1999년 광주비엔날레 호주전 커미셔너, 2005년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지냈다. 2006년부터는 백남준아트센터와 같은 재단인 경기도미술관장을 역임하다가 2012년 1월 서울시립미술관장에 임명됐다. 올해 초엔 5년마다 한 번 열리는 세계적 미술행사인 독일 카셀도큐멘타 예술감독 선정위원에 선임돼 선정작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미술계에선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국내에 일찌감치 소개한 주인공이자 다양한 여성전을 기획했던 페미니스트로 통한다. 1994년 한국미술관의 ‘여성, 그 다름과 힘’ 전, 1999년 여성미술제의 ‘팥쥐들의 행진’ 등이 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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