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 경협 활성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대북 경협을 위해서는 "마샬플랜식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끌고 있다.
남북 경협 분야 국내 최고의 전문가로 손곱히는 홍지선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북한실장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이뤄낸 성과가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대북 경협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홍실장이 제시한 남북 경협 활성화 방안을 소개한다.
"한국판 대북지원 마샬플랜이 필요하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됨에 따라 대북 경제협력에 대한 기대와 전망이 큰 화두로 되고 있다. 남북 최고 책임당국자의 만남을 북한 지도부가 수용한 배경중의 하나는 무엇보다 거의 사망선고를 받은 거나 다름없는 자신의 경제를 되살려야 하는 절박한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경협은 단기적으로 응급처치에 가까운 일방적인 대북 지원일 수밖에 없으며 특수(特需)의 도래는 퍼붓기 식의 응급처치가 얼마나 오래 걸릴 것인가에 달려 있다.
현재 북한이 겪고 있는 전기사정의 악화는 식량부족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이며 수송망은 사실상 와해된 상태이다. 이런 사정인데도 정확한 딜리버리가 생명인 수출공단건설이니 임가공 확대를 운운한다면 이는 또 하나의 남북간 불신의 씨앗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남북이 상생(相生)할 수 있는 진정한 경협관계의 발전을 위해 몇 가지 착안해야 할 사항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대북경협의 바탕을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해야 한다. 작년도 남북교역은 약 3억 3천만달러이나 이중 약 1억 1천만달러 상당의 KEDO와 인도주의적 지원 및 현대의 비거래성 거래를 제외하면 순수 상업거래는 1억 9천만달러 수준에 불과하다. 130여개 업체들이 북한과 임가공이나 반출입 거래관계를 갖고 있으나 대부분 간접적인 방식이다.
대북경협의 성공 케이스라는 대우의 남포공단 투자사업 마저도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명실상부한 상업적 투자는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남북경협은 말이 경협이지 단순한 반출입이 반복되는 물자거래 수준임을 인식하고 기존 경협의 확대라는 안이한 접근보다는 그야말로 "확 바꾸는" 자세로 출발해야 한다.
둘째, 북한을 일시적인 돈벌이 대상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노후설비나 제공하고 값싼 노동력에 눈독을 들이는 지금과 같이 우리끼리 사고 파는 식의 임가공은 바로 한계에 부딪칠 것이다. 우리나라의 해외 위탁가공용 원자재 수출이 년간 30억불 정도임을 감안한다면 북한의 인프라가 어느 정도 회복되고 북한산 원산지 제품의 미국시장 진입이 허용될 경우, 대북 임가공 무역만으로도 최소한 연간 5∼6억불 수준까지 확대될 수 있다. 따라서 기초적인 인프라 복원이 대북지원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
셋째, 정부와 민간기업간에 역할의 한계를 분명히 하여 상호보완성을 극대화해야 한다. 지원성 투자와 사업성 경협을 구분하되 프로젝트의 주체는 반드시 민간기업들이 맡도록 하고 처음부터 경제성 검토와 사업추진계획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재원활용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우리기업의 전진배치는 시장경제를 북한에 전파하여 궁극적으로 경제공동체의 회복을 촉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산업분야별로 전문기업끼리 묶어서 컨소시움을 구성하여 과당경쟁을 방지하고, 특히 일정비율의 중소기업들을 이 컨소시움에 참여시킴으로써 동반진출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본력과 정보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인 중소기업들이 이번 대북경협을 새로운 도약대로 활용하여 적어도 전체 중소기업의 20% 정도는 북한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특별배려가 요청된다.
이제 기업들의 대북 사업도 내부거래차원에서 승인과 허가제를 폐지하여 자체 판단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전면적인 자유화를 할 시기가 왔다고 본다. 타당성 검토가 필요할 경우에는 해당 업체의 경제적인 관점을 최우선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넷째, 북한경제의 원기회복은 동북아 지역에서 공동시장 형성 가능성과 직결된다. UNDP의 두만강 개발 계획이 지지부진한 가장 큰 이유는 지정학적으로 중심고리에 서 있는 북한의 능력부재였다.
지금까지 북한에게 사활적 원자재인 원유, 곡물, 유연탄의 젖줄 역할을 해 온 중국 동북 3성, 러시아 연해주, 북한경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해 온 철강공업이 집중 배치되어 있는 북한의 동북부 그리고 막대한 시장을 갖고 있는 남한간에 우선 철강산업 분야에서 원료 공급, 생산, 수송, 판매, 유통이 동시에 일어나는 "동북아 공동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경우, 북한이 시장경제의 가운데 놓이게 되는 전략적인 지각변동을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대북 경제협력은 중국, 러시아 및 일본 등 주변국가들에게 개방적이어야 하며 우리의 독점적, 선점적인 기득권 주장은 처음부터 포기해야 한다. 지난 50년간 모든 산업설비와 기술을 제공하여 북한경제 체제의 골간을 세워 준 나라가 바로 중국과 러시아다. 이들 두 국가 기업들의 적극적인 참여야말로 북한경제재건에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의 합의 결과로 진행될 대북경협은 긴급지원성이 강한 한국판 마샬플랜이 되어야 하며 일시적인 수혈식(輸血式) 지원보다 북한경제의 자생력 회복에 중점을 둔 조혈식(造血式) 경협으로 방향이 설정되어야 한다. 우리의 유연성이 북한의 요구를 어느 수준까지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투입된 자금흐름의 투명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우리식 사회주의로 강성대국을 건설하겠다고 하는 북한의 경제주권과 우리의 현실적 전략간의 접목점을 어디에서 설정할 것인가 등이 풀어야 할 숙제들이다.
제도적인 안전장치로서는 국내 참여기업의 부담을 줄여줄 수 있는 이중과세방지협정 정도로 족하며 현 단계에서 북한에게 무리하게 투자보장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청사진과 장미빛 전망에 도취할 일이 아니라 좀더 냉철함을 갖고 무엇보다 북한의 실상을 정확하게 인식한 바탕 위에 현실적인 대안을 준비하는 것이 성공적인 남북경협의 정도임을 다시 한번 지적하고자 한다. (홍지선 KOTRA 북한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