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용익의 록코노믹스]국제유가와 록음악의 함수관계

피용익 기자I 2017.11.18 11:12:13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최근 국제 유가 상승세가 심상찮다. 세계 경기가 모처럼 호황을 보이면서 원유 수요가 증가하는 가운데 주요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치 불안이 고조되며 공급 측면에서도 이상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유가가 오르면 기업의 생산비용 부담이 커지고 가계의 실질 구매력이 하락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향후 추이가 주목된다.

이처럼 유가는 경제 활동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고, 경제는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특히 40여년 전에는 기름값이 세계 경제를 뒤흔들며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긋는 일도 있었다.

1973년 10월 16일, 페르시아만의 6개 석유 수출국들은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의에서 원유 고시가격을 17% 인상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튿날 이스라엘은 아랍 점령지역에서부터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전월에 비해 5%씩 감산하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오일 쇼크’로 불리는 사건이다.

1973년 초 배럴당 2.59달러였던 원유 가격은 1년 만에 11.65달러로 4배 가까이 치솟았다. 그동안 석유를 필요한 만큼 안정적인 가격에 들여오던 석유 수입국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석유가 모자라자 공장 가동이 축소됐고, 문을 닫는 공장이 속출하면서 실업자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유가 상승은 물가를 끌어올렸고, 실직자들은 봉급이 끊긴 데 이어 높은 물가에 시달리는 이중고를 겪게 됐다.

미국의 경우 1973년 11월부터 1975년 3월까지 분기별 실질성장률이 연속 하락하는 리세션(경기후퇴)을 겪었고, 이 과정에서 실업자가 양산됐다. 실업률은 리세션이 끝난 후에도 고공행진을 이어가며 1975년 5월에는 9%로 뛰었다. 영국은 1973년부터 1975년 사이 리세션을 맞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3.9% 하락했다. 물가상승률은 20% 이상으로 치솟았다.

오일쇼크로 인해 거리로 내몰린 실직자들은 대부분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표출할 통로가 필요했다. 평소 록 음악을 즐겨듣던 실직자들은 밴드를 결성했다. 이들은 작곡 능력이나 연주 능력이 없었지만, 오히려 ‘단순함’을 무기로 분노에 찬 대중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펑크(punk) 록’의 탄생이었다.

대중음악 저널리스트인 라이언 쿠퍼는 “경제는 형편없는 모양새였다. 실업률은 사상 최고치로 치솟았다. 젊은이들은 화가 나 있었고, 반항적이었으며, 일자리를 잃은 상태였다. 이들은 강한 주장을 갖고 있었고, 자유 시간이 많았다”며 오일쇼크에 따른 펑크록 태동의 상관 관계를 설명했다.

물론 펑크록 태동 이전에 등장한 헤비메탈 역시 분노에 찬 음악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악기를 배우지 못한 젊은 실직자들이 헤비메탈을 연주하기는 쉽지 않았다. 펑크록의 곡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고, 단순한 코드로 전개되며, 화려한 기타 솔로도 없는 것은 뮤지션들의 실력 부족에 기인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1976년 영국에서 발행된 잡지 사이드번즈가 펑크록에 대한 일러스트를 실으면서 “이게 하나의 코드이고, 이건 또 다른 코드, 그리고 이건 세번째 코드. 이제 밴드를 결성하자”고 표현한 것은 펑크록 밴드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펑크 매거진의 에디터인 존 홈스트롬은 “펑크록은 뮤지션으로서의 기술은 별로 없지만 음악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필요를 느낀 사람들에 의한 로큰롤”이라고 설명했다.

1977년 영국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스의 폴 쿡, 시드 비셔스, 조니 로튼, 스티브 존스(왼쪽부터 오른쪽으로)가 걸어가고 있다. (사진=AFP)
헤비메탈이 영국에서 시작된 반면 펑크록의 등장은 동시다발적이었다. 미국에서는 뉴욕의 클럽 ‘CBGB’를 중심으로 1974년부터 라몬즈 등의 밴드가 공연 활동을 하며 펑크록의 초석을 다졌다. 영국에서는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은 거리에서 몰려다니며 ‘펑크’ 문화를 형성했고, 일부 펑크족들은 섹스 피스톨스, 더 클래시 등의 밴드를 결성했다.

젊은이들이 펑크록을 통해 분노를 표출한 것은 당시 록 음악이 지나치게 대중화돼 이들의 반항심을 대변해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홈스트롬은 “빌리 조엘이나 사이먼 앤 가펑클 같은 뮤지션들의 재미없는 음악이 로큰롤이라고 불리는 상황에서 펑크록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거부한 것이 빌리 조엘 같은 당시의 주류 음악 뿐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더 클래시는 ‘1977’이란 곡에서 “1977년에는 엘비스, 비틀즈나 롤링 스톤스는 안 돼요(No Elvis, Beatles or the Rolling Stones in 1977)”라며 선배 록 뮤지션들을 부정했다.

다만 펑크 록 밴드가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은 당시 경제 상황에 대한 노동계층의 분노였다. 이는 노래 가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더 클래시의 ‘Career Opportunities’의 가사는 “직업, 직업, 직업, 그것은 결코 문을 두드리지 않아(Career, career, career, it ain′t never gonna knock)”이란 외침으로 끝난다. 섹스 피스톨스의 ‘God Save The Queen’은 “당신에게 미래는 없다(There′s no future for you)”라며 영국 경제의 현실을 조롱했다.

하지만 펑크록의 아이콘과도 같은 섹스 피스톨스는 단명했다. 이들이 1975년부터 1978년까지 활동하며 발표한 정규 앨범은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1977)가 전부다. 더 클래시와 라몬즈, 그리고 수많은 밴드들은 활동을 지속했지만 예전과 같은 문화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펑크 록의 인기가 갑작스럽게 식은 것은 섹스 피스톨스의 해체가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는 해석이 많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세계 경제가 다시 호황을 맞으면서 ‘분노’라는 펑크 록의 동력이 상당 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1차 오일쇼크 이후 국제 유가는 몇 차례 파동을 겪긴 했지만 과거와 같은 위기로 이어지진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근의 유가 상승세 역시 록 음악으로 분노를 표출할 수준까진 아닌 것 같다.

●섹스 피스톨스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는 1975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됐다. 보컬 조니 로튼, 기타리스트 스티브 존스, 드러머 폴 쿡, 베이시스트 글렌 맷록으로 출발했으나 후에 시드 비셔스가 베이시스트로 새로 영입됐다. 활동 기간이 2년 반에 불과했지만, ’영국 펑크 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밴드‘라는 평가를 받는다.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 (1977)

1. Holidays in the Sun

2. Liar

3. No Feelings

4. God Save the Queen

5. Problems

6. Seventeen

7. Anarchy in the U.K.

8. Bodies

9. Pretty Vacant

10. New York

11.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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