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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사에서 비대위 성공사례는 2012년 박근혜 비대위, 2016년 김종인 비대위 정도밖에 없습니다. 비대위원장이 강력한 차기주자이거나 당의 오너가 전권을 부여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MB정부 말기 박근혜 비대위는 당명 및 상징색 교체, 경제민주화 이슈 선점으로 최악의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19대 총선 과반에 이어 2012년 대선승리를 기록했습니다. 20대 총선 직전 민주당은 국민의당 창당에 따른 야권분열로 참패가 예상됐습니다. 김종인 비대위는 친노좌장 이해찬마저 날리는 과감한 인적쇄신을 단행, 호남참패에도 수도권에서 압승하며 원내 제1당을 달성했습니다.
◇20대 총선 참패 이후 일상화된 위기…참여정부 시절 열린우리당 암흑기와 유사
한국당은 의석수 112석의 제1야당입니다. 덩치만 공룡이지 존재감은 미약합니다. 화려했던 시절 아무리 적어도 30% 안팎의 콘크리트 지지층은 어디론가 가고 원내 5석의 미니정당인 정의당과 ‘도토리 키재기’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위기의 일상화입니다. 20대 총선 참패 이후 본격화된 보수의 위기는 아직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총선참패, 국정농단, 대통령 탄핵, 보수정당 분열, 대선·지방선거 참패 등 주요 고비 때마다 계파갈등만 되풀이됐습니다. 국민적 판단과 헌법절차에 따른 심판이 내려진 ‘박근혜 탄핵’에도 사실상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도부 역시 임시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무기력 그 자체입니다. 과거 참여정부 시절 재보선 연전연패로 비대위 체제로 연명했던 ‘열린우리당 암흑기’를 떠올리게 할 정도입니다. 물론 김병준 비대위 체제는 지난 7월 중순 출범 당시만 해도 여야 안팎의 적잖은 기대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여야 정당 대표는 모두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합니다. 대의원·당원의 투표를 물론 일반국민 여론조사까지 이뤄집니다. 그래야만 당 대표로서 정통성을 보장받고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전당대회를 거치지 않은 비대위원장은 출발부터 한계에 직면합니다. 김병준 비대위는 당 쇄신 및 혁신 작업을 외부인사가 맡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다만 한나라당이 그토록 반대했던 참여정부 청와대 정책실장이라는 점에서 보수의 궁색한 처지를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비대위 앞에 ‘혁신’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였지만 당 쇄신과 혁신은 실종됐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에도 한국당이 전혀 반사이익을 누리지 못한 이유입니다. “김병준은 간단한 사람이 아니다. 나중에 보수진영의 유력 주자가 될 수 있다”며 경계에 나섰던 민주당 안팎에서도 최근에는 안도하는 모양새입니다. 김병준 비대위의 최대 성과로 여겨지는 계파화합은 비대위의 정치적 역량이라기보다 ‘더 이상의 계파갈등은 공멸’이라는 위기의식 탓에 확전을 친박, 친홍, 비박 복당파가 서로 확전을 자제했기 때문입니다. 차기 전당대회나 인적쇄신 국면에서 언제라도 불거질 수 있는 휴화산입니다.
◇‘존재감 부족’ 한국당 비대위, 외연확대 실패에 보수가치 회복도 난망
김병준 비대위는 현재 대내외적으로 자유한국당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문재인정부의 국가주의를 비판하며 이목을 끄는데 성공했지만 한계도 뚜렷해 보입니다. 당 지지율은 답보 상태이고 보수가치의 재정립에도 실패했습니다. 김병준 위원장이 보수진영의 지분도 없는데다 강력한 차기주자가 아니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입니다. 특히 여의도 바닥에서 모든 정치적 행위는 말과 글을 통해 이뤄집니다. 김병준 위원장의 메시지가 파급력을 발휘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보수진영의 스피커 역할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당 외곽에서 “박정희 천재” 발언으로 유명한 이언주 바른미래당 의원이 가장 열성적입니다. 내부 인사로는 홍준표 전 대표, 김성태 원내대표, 전원책 조강특위 위원의 발언이 김병준 위원장보다 화제성이 높습니다. 아울러 당 쇄신과 혁신의 양대 축인 비대위와 조강특위의 불협화음이 지속되고 있는 것도 우려스러운 대목입니다.
특히 한국당에서 쏟아지는 지나친 강성발언도 문제입니다. 물론 야당으로서 정권 비판과 견제는 당연합니다. 다만 △유럽순방 개망신 △파시즘적 국정운영 △쿠데타적 정권 등 여론과는 거리가 멉니다. 강경보수 결집에만 도움이 될 뿐 외연확대에는 걸림돌입니다. ‘문재인 반대’만 외친다고 보수가 살아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한국당과 태극기부대의 차이를 없애는 지점입니다. 과거 이념보수가 아닌 상대적으로 유연한 시장보수를 지향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경제민주화를 기치로 2012년 대선에서 나섰던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보다 더 후퇴한 상황입니다. 황교안 전 국무총리에 대한 입당 권유 등 보수가치의 재정립이나 중도로의 확장성을 포기한 채 무조건적인 몸집 부풀리기도 만연합니다. 김병준 비대위원장이 당 안팎의 이러한 퇴행적 정치에 대해 적극적으로 제지한 경우도 찾기 힘듭니다. 사실 한국당 비대위는 가장 중요한 초기 3개월을 허송세월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대로 가면 2020년 21대 총선은 비상등 ‘깜빡 깜빡’입니다.
◇‘공천권 없는 유명무실’ 비대위 vs 절대권력 휘두른 박근혜·김종인 비대위
백년정당을 표방했던 열린우리당의 존속기간은 4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 의장만은 김원기→정동영→신기남→이부영→임채정→문희상→정세균→유재건→정동영→김근태→정세균 등 무려 11명을 배출했습니다. 구원투수로 불렸던 비대위원장 체제가 더 익숙했던 시절입니다. 한국당 역시 총선참패 이후 김희옥 비대위 체제, 대통령 탄핵 이후 인명진 비대위 체제에 들어섰지만 존재감 제로였습니다. 계파갈등과 기득권의 벽 앞에서 유명무실한 비대위로 전락했습니다. 대중이 기억하는 장면은 김희옥 위원장의 보이콧과 정진석 원내대표의 사과 그리고 인명진 위원장과 친박계 맏형 서청원 의원과의 거친 설전 정도입니다. 김병준 비대위 역시 비슷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여론 지지를 바탕으로 최대 난제이자 최우선 선결과제였던 인적쇄신부터 단행해야 했지만 후순위로 넘겼습니다. 이대로 가면 혁신은 고사하고 내년초 전당대회 국면까지 ‘관리형 비대위’ 역할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따져볼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든 진리입니다. 42.195km를 뛰는 마라톤에서 경쟁자나 페이스메이커가 없으면 좋은 기록이 나올 수 없습니다. 어렵고 또 어렵지만 김병준 비대위가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역설적인 이유입니다. 진보의 슬로건이었던 경제민주화 프레임을 선점했던 박근혜 비대위나 ‘이해찬 공천탈락’ 등 다소 무리해보였지만 과감한 인적쇄신을 단행했던 김종인 비대위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계파갈등을 우려해 눈치보기로 일관한다면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시간 때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김병준 비대위의 성공은 보수진영은 물론 문재인 정부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김희옥 비대위, 인명진 비대위, 류석춘 혁신위에 이어 김병준 비대위마저 실패한다면 글쎄요? 21대 총선에서 한국당의 생존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한국당의 완전한 몰락은 대한민국 정치의 불행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