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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부실 예산심의'[안종범의 나라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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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기자I 2025.11.27 05:00:00

대내외 격변기 국가 생존전략 된 내년 예산
728조 슈퍼 예산에 대한민국 미래 달려
국회선 형식적 심의, 그마저 정쟁에 악용
국민이 깨어 국가 운영의 설계도 지켜내야

[안종범 정책평가연구원 원장] 12월 2일은 2026년도 예산안 통과 법정기한이다. 불과 5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9월 1일 시작한 예산안 심의는 제대로 가고 있을까. 국내외적 경제 여건이 위기로 인식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이뤄지는 내년도 예산 심의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과연 300명의 국회의원과 그중 50명의 예결위원은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을까.

지난해 2025년도 예산안은 한국 정치사에서 전례 없는 방식으로 처리됐다. 여야가 합의하지 못한 채 야당 단독으로 예산안이 수정·의결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해외 의회 사례를 아무리 찾아봐도 한 정당이 단독으로 예산안을 수정하고 통과시킨 적은 없다. 최근 미국에서처럼 갈등이 극대화되면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아 ‘셧다운’(shutdown·일시적 업무 정지)이라는 극단적 상황이 발생하지 특정 정당이 예산을 독점 처리하는 구조는 제도적으로 막혀 있다.

미국은 이번 셧다운으로 43일 동안 연방정부 상당 부분이 마비됐다. 건강보험개혁법(ACA·일명 오바마케어) 보험료 세액공제 연장, 공공지출 감축 여부를 둘러싸고 민주·공화 양당이 극한 대치를 지속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 갈등 속에서도 ‘단독 처리’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미국은 상원의 필리버스터, 대통령의 거부권, 양원제라는 복합 구조로 인해 어느 당이 다수여도 예산안을 마음대로 통과시킬 수 없다. 셧다운이라는 비용이 크긴 하지만 한 정당이 국가 재정을 독점적으로 재구성하는 자의적 행위를 막는 제도적 안전장치가 작동하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다르다. 예산안은 법정기한을 넘기면 자동으로 본회의에 상정되고 필리버스터도 불가능하다. 결국 국회 다수를 확보한 세력이 의지만 있다면 예산안을 단독으로 수정하고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치 갈등이 높아질수록 합의 대신 ‘힘의 정치’가 작동하고 예산안이라는 국가의 최상위 재정 계획이 정파적 무기로 전락하는 위험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 정치에서 예산안 처리가 늦어지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1988년 현행 헌법 적용 이후 지금까지 36번의 예산안을 처리하는 동안 헌법 54조 2항에 명시된 시한을 지킨 경우는 7번에 그쳤고 나머지 29번은 모두 지각 처리됐다. 그중에서 2004·2009·2011년은 12월 31일에야 통과됐고 2013·2014년도 예산안은 해를 넘겨 1월 1일 새벽에 ‘막판 처리’된 사례까지 있다.

과연 이러한 그동안의 부실투성이 예산 심의가 올해는 해소될까. 지금까지 보면 거의 그렇지 않아 보인다. 문제는 2026년 예산이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가 맞이한 대내외 복합 위기 속에서 예산이 사실상 ‘국가 생존전략’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2026년 한국 경제는 미국과의 관세 협상 영향, 미국·유럽의 경기 둔화, 중국 성장 둔화로 인한 교역 감소, 청년·고령층 고용 압박, 저출산·고령화 문제 등 다중 충격을 한꺼번에 받고 있다. 재정 역시 지출 확대와 세수 결손이 반복되고 있고 국가채무 증가 속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서도 가장 빠른 편에 속한다. 이런 복합 리스크는 2026년 예산안에 그 어떤 해보다 높은 ‘정책적 설계 능력’을 요구한다.

정부는 2026년 예산안 규모를 약 728조원으로 제시했다. 이는 전년 대비 약 8.1% 증가한 수치다. 또한 정부 수입(세입)은 3.5% 늘어난 약 674.2조원으로 책정했다. 이 예산안의 주요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미래산업·첨단기술에 대한 전략적 집중 투자다. 인공지능(AI) 분야에 대한 투자를 올해(약 3.3조원) 대비 약 3배 수준인 10.1조원으로 대폭 늘렸다. 둘째, 재정건전성과 효율성 강화를 위해 지출 확대에도 불구하고 ‘선택적 확대’와 ‘불필요 지출 정비’를 병행하겠다고 밝혔다. 이 모든 흐름은 “2026년 예산안은 단순 지출계획이 아니라 위기 대응 로드맵”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경제성장률이 둔화하고 수출이 위축되는 국면에서 재정이 얼마나 기민하게 작동하느냐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 특히 기술 경쟁이 가속하는 시대에 인프라화된 투자 없이 뒤처지면 한 세대가 낙오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심의의 질이다. 2026년 예산안의 심의과정은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정쟁 중심으로 흐르고 있다. 상임위원회에서는 수십조원이 배정된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질의·토론이 몇 시간에 불과하거나 핵심 사업에 대한 검토가 생략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정책평가연구원의 정책 에이전트 서비스 ‘PERI AI’를 통해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의 예산안 심의 관련 내용을 분석해 봤다. 11월21일까지 여덟 차례 예결위 전체회의와 다섯 번의 예결소위 회의록을 분석해 본 결과 공청회를 제외한 회의의 경우 예산안·재정·세입세출 등과 같은 키워드 중심의 예산 논의 비중이 11%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경제부처 심사와 같이 정치 현안 질의가 많은 회의에서는 예산 키워드 비중이 7% 수준으로 더 떨어지는 패턴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예산심의의 구조적 문제는 예산이 정책 수단이 아니라 정치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을 낳는다. 2025년의 야당 단독 처리 사건이 보여준 가장 큰 교훈은 ‘다수결은 예산심의의 원칙이 아니라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2026년 예산안은 규모 면에서도 내용 면에서도 그리고 경제적 맥락에서도 역사상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상임위 단계에서 실효성 있는 검토를 강화하고 예결위에서의 정책 중심 토론을 회복하며 정쟁은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언론과 지식인 그리고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 국가 운영의 설계도인 예산안의 심의가 정치 공방의 장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누가 그리고 어떤 발언이 진정 국가를 위하는 것인지 지켜봐야 한다. 2025년의 파행과 2026년의 지금까지의 부실한 심의를 거울삼아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예산 심의가 이뤄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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