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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명창의 외가는 국악 명가다.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강백천이 외당숙이고, 안 명창의 외삼촌은 동편제 판소리 명창 강도근이다. 이런 영향으로 안 명창을 비롯해 동생 안옥선씨와 딸까지 모두 같은 길을 걷고 있다. 남달리 영리하던 아홉살 소녀 안숙선에게 처음 가야금을 가르친 것도 이모였다.
진주에서 후학을 양성 중인 강순영 명인은 어린 시절의 안 명창을 “절대 남 뒤에는 안 서는 아이”로 기억했다. “남보다 못하면 성이 나서 안돼. 성질이 불꽃같거든. 배우는 데 너무 욕심이 많아서 야단칠 일이 없었지.” 왜 딸이 아닌 조카에게 가야금을 가르쳤냐는 질문에 그는 “예술은 우선 얼굴이 볼 만해야 하는 것인데 우리 딸은 안 예뻐서”라며 웃었다. 이모의 한복 매무새를 만져드리며 “너무 곱네”를 연발하던 안 명창은 “이모의 연주를 들으면 순수한 음악 세계가 그대로 느껴진다. 나도 이렇게 살아야지 싶다”고 말했다.
‘남원의 애기명창’으로 출발해 지금은 ‘국악계의 프리마돈나’로 불리는 안 명창이지만, 50년 소릿길이 늘 평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도 딱 한번 외도를 한 적이 있다. 70년대 중반 남편과 함께 신촌에서 순대국집을 한 것. “어릴 때는 달아나고 싶은 적도 있었어요. 차라리 돈이라도 벌어보자는 생각에 식당을 열었는데 1년 만에 닫았어요. 그때 장사가 잘됐더라면 어땠을까 모르지.(웃음) 결국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음악 밖에 없었던 거지요. 어릴 때부터 봐왔고, 그렇게 자라왔으니까.”
딸 최영훈씨 역시 특별히 가르치거나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다만, 판소리를 하겠다고 하는 딸에게 어머니는 “너는 손이 곧으니 거문고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판소리가 얼마나 힘든 길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최씨는 “어릴 때는 엄마가 집에 있는 다른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이제는 안숙선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느낀다”고 말했다. “집에서도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몸 관리를 하시고, 연습량도 다른 사람이 따라가기 힘들어요.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물으면 서슴없이 안숙선이라고 대답해요.”
안 명창은 “나이가 들어 시간이 생기고 보니 음악만을 위해 너무 이기적인 삶을 산 것 같아 가족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얼마 전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북한에 다녀온 뒤 음악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고 한다. “<춘향전>의 ‘사랑가’ 한 대목을 하고 나니 딱딱한 분위기가 풀어지는 게 느껴졌어요. 우리 음악은 따뜻한 봄빛 같아요. 언 것을 녹이고, 닫힌 것을 열어주거든요. 손녀가 넷인데 하나쯤은 또 음악을 했으면 싶어요. 어떤 놈이 잘할까 지켜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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