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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득 칼럼]'몰염치'가 '상식'을 우롱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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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득 기자I 2025.11.14 05:00:00
새가슴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평범한 소시민들은 거의 누구나 다 안다. 경조사 때 도움 준 이들의 이름과 마음씀을 잊어선 안 된다는 걸. 보답하지 않으면 몰염치한 사람이 되고 만다는 생각에 다녀간 이, 위로해 준 분들의 이름 석 자와 온정을 기록한 노트나 파일을 소중히 간직한다. 치부책이 아니라 두고두고 갚아야 할 심적, 물질적 부채의 빚 장부여서다.

돈 되는 고급 정보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이 땅의 보통 사람들은 투기를 꿈도 꾸지 못한다. 어디에 길이 날지, 쓸모없는 땅이 갑자기 택지로 둔갑할지 미리 알 도리가 없으니 인근 부동산에 쪽집게 베팅할 엄두를 낼 수 없다. 로또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는 것만이 일생일대 소원일 뿐 변변찮은 지갑으로는 강남 일대 고급 아파트와 오피스텔 등을 장보기 하듯 쓸어담을 수 없다.

아무리 자녀를 위한다고 해도 든든한 뒷배가 없는 이 땅의 평범한 부모들은 입시생 자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기도나 학원 라이딩 외에 거의 없다. 서류 전형에 들이밀 표창장 등을 가짜로 만들 재주도, 배짱도 없다. 들통 나면 감옥에 가거나 집안 망신을 살 것이 뻔해서다. 자녀가 힘들다고 열 번을 짜증 내도 백 번을 말없이 받아주고 잘되기만을 빌 뿐이다.

국정감사 기간 중 국회 경내에서 딸 결혼식을 치른 최민희 국회과방위원장의 처신을 둘러싼 논란이 한 달 가까이 지속된 탓에 이야기를 또 꺼내는 게 조심스럽다. 최 위원장이 입었을 이미지 손상은 물론 새 출발을 한 젊은 부부가 안았을 마음의 상처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일이 우리 사회 지도층, 특히 고위공직자들에게 날렸을 경고와 각성의 메시지 무게는 가볍지 않다. 최 위원장이 한참 후 내놓은 해명의 진위 여부를 떠나 그도 인정했듯 결혼식의 장소·일정·부조·화환 등에서 비난과 비판을 살 소지는 너무도 충분했다. 국회 상임위원장이라는 자리의 중요성에 비춰 볼 때 후유증을 얼마든지 예상하고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했어야 옳다. 장소가 국회 경내였다고는 하지만 화환, 축의금 사절의 결심만 따랐어도 결혼식은 빛나고 하객들의 시선엔 존경이 더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재력이 탄탄하다는 것이 질시와 손가락질의 표적이 돼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정부의 고위공직자들 중 재산형성 과정에서 ‘프로’ 못지않은 솜씨를 발휘한 인물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꾼이나 손댄다는 도로 부지 투자로 10억원을 번 장관이 있는가 하면 고가 아파트를 몇 채씩 보유했거나 대출받아 갭투자로 한몫잡은 공직자가 수두룩하게 나왔다. 대출을 꽁꽁 묶은 탓에 주택 구입 통로가 막힌 서민들에게 “수억, 수십억씩 빚내 집 사는 것은 비정상”이라는 말을 했다가 물러난 사례까지 등장했다. 무주택 설움에 지친 서민의 아픔을 이해하고, 자신의 말 한마디가 상처를 주지 않을까 조심했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2025년의 끝자락이 보이기 시작한 시점에서 과거보다 유난히 더 자주 떠올리게 된 올해의 두 글자는 ‘염치’다. 염치가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중요한 덕목의 하나임을 모르는 성인은 별로 없다. 명나라 말과 청나라 초기의 격변기를 살았던 사상가 고염무는 자신의 ‘일지록’에서 “예의가 남을 다스리는 커다란 법이라면 염치는 사람이 바로 서는 커다란 규칙”이라고 했다. “천하의 흥망엔 필부라도 모두 책임이 있다”는 말로 염치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맹자는 “개개인이 염치를 상실하면 나라 전체가 치욕을 당한다”고도 했다. 법을 어겼으면서도 범법 사실이 증명되지만 않으면 당당해하고, 그런 몰염치가 능력으로 대접받는 풍토는 배척돼야 한다. 순리를 벗어난 채 돌아가는 세상과 고위공직자들의 현란한 재주에 분노와 두려움을 느끼는 보통 사람이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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