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의철논설위원] 일단 재판정의 분위기부터 전하자.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은 엄숙했다. 재판부는 위엄이 있었고, 조준웅 특별검사의 논고는 준엄했다. “피고인들이 국가경제에 기여한 바 크고, 조세포탈금액을 이미 납부했다는 점에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으나 피고인들의 죄는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다. 피고인 이건희 징역 7년에 벌금 3500억원, 피고인 이학수 김인주 각각 징역 5년.....” 일순 법정은 침묵. 이어 방청석에 앉아있던 기자들이 1보를 송고하기 위해 우르르 자리를 떴다.
피고인석 이건희 전 삼성회장의 얼굴을 쳐다봤다. 별다른 표정변화는 없다. 방청석에 앉아있던 삼성 관계자들의 얼굴엔 약간의 당혹감이 스친다. “생각보다 세다”는 표정이다.
‘2008 고합 366사건’(법원에서 부르는 삼성 재판의 이름이다)은 이렇게 진행됐다.
특별검사가 이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 지는 재판의 중요한 모티프다. 조 특검의 논고를 빌어 직접 이를 확인해보자. “이 사건은 국내 최대 재벌 총수가 사적이익을 위해 회사 비서실을 통해 계열사의 이익을 침해해 가면서까지 대주주 일가의 이익을 도모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및 삼성SDS BW 발행건을 지칭하는 것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비서실을 통해’라는 표현이다. 이는 결국 회장의 직접적인 지시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삼성이나 이건희 전회장의 스타일로 미루어봤을 때 이 문제를 이 전회장이 직접 “이렇게 저렇게 하시요”라고 지시했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밑에서(당시 김인주 이사의 기획작품으로 알려져있다) 기안해서 보고하고 회장은 고개를 끄덕거린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직접 지시하지 않았다고 해서 책임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회장은 총괄 책임자고, 아들 상속 문제를 최종 결정한 것은 어찌됐건 이건희 전회장 본인이기 때문이다. 최근 중앙일보의 사진 연출이 문제가 돼 사회적 이슈가 된 바 있는데, 담당 데스크가 사진을 연출하라고 지시(이럴 가능성 역시 0%다)하지 않았어도 결국 책임은 데스크가 지게 돼 있다. 책임은 그래서 무겁고 또 두려운 것이다.
이어지는 변호인단의 최후 변론. 굳이 변호인단의 변론을 세세히 옮길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특별검사와 변호인단간의 주요 쟁점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우선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와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발행건과 관련해선, ‘저가발행을 통해 피고인들은 회사측에 재산상의 손해를 끼치는 배임행위를 했다’(특검)는 주장과 ‘CB와 BW발행가는 적정했고, 주주들간 단순한 부의 이동이 일어났을 뿐’(변호인단)이라는 주장이 맞선다. 손해액에 대해서도 이재용 등의 미래이익 전부가 기존 주주들의 손해액이라는 것이 특검측 주장인 반면, 회사엔 손해를 끼치지 않았으며 주주들의 손해액이 있다 하더라도 적극적 손해액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변호인측 주장이다.
조세포탈과 관련해선 실정법을 어긴 것은 인정하지만 경영권 방어를 위해 차명주식을 보유한 경위와 의도 등을 정상참작해야 한다는 것이 변호인측 최후 변론의 요지다. 그래서 에버랜드 CB및 SDS BW 발행과 관련된 배임 혐의에 대해선 무죄를 주장하고, 조세포탈 혐의에 대해서도 통상의 조세포탈과는 다른 점을 들어 최대한 선처를 호소했다.
이 전회장은 간간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변호하는 변호사를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이 전회장은 깊고 큰 눈을 가졌다. 변호사가 말을 잘하고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엉뚱한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인지 그 표정만으론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회장 주재 회의에서 사장단들이 저런 식의 시선을 받으면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흐르겠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
이어지는 피고인들의 최후변론. 이 전회장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전회장은 메모지에 최후진술을 적어왔다. 비교적 명료한 목소리로 또박 또박 읽어 내려갔다. 다음은 그 전문.
“존경하는 재판장님, 판사님들께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그간 특검수사와 재판을 받으면서 느낀 점 많았습니다. 삼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분들도 많았지만, 꾸짖고 걱정하는 소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새삼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간 앞만 보고 멀리 보고 해외기업들과의 경쟁에만 신경쓰느라 제 주변의 문제에 대해선 소홀했습니다. 사회와의 소통도 부족했습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국민들에게 송구스럽고 삼성 임직원들에게 미안합니다. 경위야 어찌됐건 회사 주식이 자식에게 넘어가는 문제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것은 제 잘못입니다. 차명으로 된 주식을 관리하면서 세금을 안 낸 것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법적으로 문제된 것 바로 잡고 가겠습니다. 법적이든 도의적이든 책임은 제가 지는 게 마땅합니다. 아랫사람들에 대해선 선처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20년간 제 정성과 혼을 바친 삼성 임직원들이 용기를 잃지 않게 격려해주십시오. 재판장님의 판결을 겸허히 기다리겠습니다”
굳이 전문을 다 옮긴 것은 표현 하나하나가 이 전회장의 상황인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회장은 법정에서 또는 대중앞에서 한마디를 할 경우라도 어떤 단어를 써야할 지,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할 지를 놓고 밤새워 고민하는 성격이다. 그만큼 심사숙고형이고 생각이 많다”(전직 삼성 비서실 임원 A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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