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장으로서 그의 생환은 마치 2010년 선거를 떠올리게 했다. 2010년 6월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에 들어선 당시 오 시장은 굳은 표정으로 “계속 지켜봐야겠지만 지금 기초단체장 선거 결과를 보면 사실상 한나라당의 패색이 짙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며 고개를 떨궜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여성 최초 국무총리와 최연소 민선 서울시장의 서울시장 선거가 전자의 승리로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밤사이 뒤집힌 표심은 0.6% 포인트 차이라는 극적인 역전을 만들며 젊은 정치인의 인생 2막을 열었다. 이렇듯 화려한듯 보이는 그의 정치인생은 언제나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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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월 서울 성동구에서 태어난 오 시장은 가난 때문에 어린시절 여러 국민학교를 전전했다. 전구조차 마음껏 밝히기 힘든 가정환경이었지만, 소년은 “공부만 잘하면 우리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어머니를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 그렇게 20대에 대한민국 법조인이 됐고, 대기업과의 아파트 일조권 소송에서 승소하며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바위에 계란치기’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헌법상 환경권을 인정받은 그는 각종 방송프로그램과 광고에 출연하면서 신선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오 시장은 이 인기에 힘입어 제16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한나라당 내 소장파 모임인 미래연대를 이끌면서 2004년에는 현행 정치자금법의 근간인 이른바 ‘오세훈 선거법’(정치관계법 개정)을 주도하고 당의 위기마다 인적쇄신을 주창했다. 여야 중진 의원들이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줄줄이 구속될 때는 초선 의원임에도 “정치가 아니라 전쟁을 하듯 늘 갈등만 했던 게 부끄럽다”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진심어린 결단은 정치권의 세대교체 바람으로 번졌고, 소신 행보에 열광한 여론은 그를 최연소 민선 서울시장 자리에 세웠다.
2011년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탄탄대로만 걸을 것 같던 오 시장의 행보에 제동을 걸었다. 보편복지 대 선별복지의 논쟁에서 오 시장은 낮은 현실성을 지적하며 시장자리를 건 주민투표를 추진했다. 하지만 투표율은 개표 기준(33.3%)에 못 미쳤고, 그는 시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에겐 이후 10년 동안 ‘민주당에 서울시를 넘기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꼬리표가 붙기도 했다.
어려울수록 낮은 곳에서 ‘보수가 나아갈 길’ 찾아
모두가 복귀하기 어렵다고 고개를 저을 때 오 시장은 1년간 지구 반대편인 남미 페루와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힘든 처지에 놓인 이들의 현실을 살폈다. 르완다 시골에서 만난 아이들은 맨발로 흙바닥을 뛰어다녔다. 기생충이 살을 파고들어 썩은 발톱을 봤을 때 그는 “시스템이 공정하지 않고 사다리가 끊어진 사회에서는 아무리 나라가 부유해져도 가난한 사람은 영원히 가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 일화를 훗날 자서전에서 밝히면서 김영삼 정부의 사회보장기본법 제정과 이명박 정부의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 시행에서 볼 수 있듯이 보수가 복지 논쟁에서 움츠러들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복귀 후 그가 제시한 ‘약자와의 동행’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일례로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무료 온라인강의 등 학습 기회를 제공하는 교육 지원 플랫폼, ‘서울런’은 어린 시절 그처럼 공부할 기회를 찾는 청소년을 위해 마련됐음에도 수차례 엎어질 위기에 처했다. 110석 중 101석을 민주당이 차지한 당시 시의회에서 추가경정예산안으로 편성된 예산 58억원을 전액 삭감했다. 교육감의 고유권한을 침해한다는 주장과 함께 외려 사교육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때마다 오 시장은 공무원들과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시의회와 교육청, 중앙정부의 문을 계속 두드렸다. 그 결과 서울런에서 배출된 대학합격자는 2024년 682명에서 올해 914명으로 불어났다.
이 과정을 함께한 김병민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은 “(오 시장은) 365일 서울만 바라보니까 어떤 부분을 부족하다고 느끼는지 잘 안다”며 “정치적 유불리를 고려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시민의 뜻에 맞다고 생각하면 시민들을 믿고 그 길을 간다”고 말했다.
세 번의 최초 그후…“더 따뜻한 서울 만들겠다”
어느덧 당내 중진급 정치인으로 성장한 오 시장은 처음 정계에 진출했을 때처럼 올해 정당에 쓴소리를 앞장서서 했다. 윤석열 정부를 지지하는 극우세력과 결별하지 못한 국민의힘 지도부를 향해 그는 ‘당 노선 정상화’를 선결 과제로 내걸며 공천 신청을 거부하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 보수의 변화를 촉구하면서 당 의원총회에서 소속 의원 전원이 윤 전 대통령과 절연하는 움직임을 이끌었다.
당내 집안싸움은 이번 지방선거 초반에 오 시장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과거의 자신처럼 새로운 이미지를 가진 정원오 후보가 민주당의 지지에 힘입어 세력을 키울 때 그는 당 대표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홀로 시정과 선거 준비를 챙겨야 했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16년 전처럼 오 시장의 소신에 투표를 행사했다. 1.15% 포인트의 초접전 끝에 오 시장의 손을 들어주면서 최초의 5선 서울시장이란 기회를 허락했다. 또 다시 시의회에서 여소야대 국면이 조성됐지만 번번이 위기를 극복한 그는 야권의 대권 잠룡으로 부상했다. 정치인생의 새로운 장을 쓰게 된 오 시장은 다섯번째 시장직 수행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의 균형을 지켜주신 시민들께 깊은 존경과 감사드립니다. 어디에 사시든, 어떤 형편이든 노력한 만큼 공정한 기회를 부여받고 더 따듯한 서울시를 만들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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