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대표 불교 축제 연등회, 어떻게 세계유산 됐나

김은비 기자I 2020.12.18 08:22:10

화합·공동체 강조하는 불교 정신 영향
고려 때 남녀노소 즐긴 국가적 행사로 발전
"크고 화려하기 보단 시민들의 참여 중요"

매년 음력 4월 8일 부처님오신날 열리는 연등회 모습(사진=문화재청)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매년 음력 4월 8일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전국 각지 사찰과 도시 곳곳에는 각양각색의 등이 거리를 장식한다. 서울 시내에만 5만여 개의 등이 불을 밝힌다. 거리에는 종교를 떠나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직접 만든 연등을 들고 나온 사람들이 행렬을 만들어 걷는다. 신기한 동양의 문화는 외국인 관광객에도 관심거리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만 매년 30만명이 넘는다.

한국의 대표 불교행사 연등회(국가무형문화재 제122호)가 지난 16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화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연등회가 시대를 지나며 바뀌어 포용성으로 경계를 넘어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점, 사회적 경계를 일시적으로 허물고 기쁨을 나누고 위기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 등을 높이 평가했다.

불교 행사인 연등회는 어떻게 오늘날 세계인들이 즐기는 축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걸까. 전문가들은 화합, 배려 등 불교의 핵심적 메시지 덕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박상미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 위원은 “형형색색의 등을 든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화려한 축제지만 운영에 있어 절제와 약자를 위한 배려가 보인다”고 설명했다. 박상희 연등보존위원회 전문위원은 “연등회에서는 모두가 공동체로 함께하며 하하호호 웃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한다”며 “이것이 곧 불교의 기본 정신이고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방향”이라고 했다.

연등회는 통일신라 때 처음 시작해 100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 특히 불교 국가였던 고려시대에 연등회는 국가적 행사로 자리잡았다. 고려 태조가 남긴 ‘훈요십조’에 따르면 음력 정월 보름과 2월 보름에 국왕과 온 백성이 풍년을 기원하며 궁궐부터 시골까지 화려한 연등을 밝히고 잔치를 열고 가무를 즐겼다. 왕이 행차했다 돌아오는 가두행진의 길 양 옆에는 이틀밤에 걸쳐 3만개의 등불을 밝혀 불빛이 낮과 같이 밝았다고 할 정도로 성행했다.

이때는 어른뿐 아니라 아이들도 연등회를 즐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호기 놀이’가 유행했는데 아이들은 연등회를 앞두고 종이를 오려 장대에 붙여 깃발을 만들고 물고기 껍질을 벗겨 북을 만든 뒤, 깃발을 앞세우고 북을 두드리면서 마을과 거리를 몰려다니며 연등 비용을 보태달라고 외쳤다. 이렇게 쌀과 베를 얻어다가 연등회 비용으로 썼다. 박상희 전문위원은 “한국판 핼러윈인 셈”이라고 말했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국가가 주관하는 연등회는 중지됐지만 규모가 줄진 않았다. 민간에서는 민속행사로 남아 세시풍속으로 전승됐다. 집집마다 장대를 높이 세우고 자녀의 수대로 등을 밝혔고, 거리 곳곳에 형형색색의 등을 달았다.

현대에서 연등회는 1955년부터 다시 시작됐다. 초창기에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조계사를 중심으로 연등을 든 행렬이 걷는 수준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대학생, 직장인 등 자발적 연등회 참여인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5년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더욱 참가자가 늘어났다.

다양한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행사를 고민하면서 연등행렬을 비롯해 불교문화마당, 어울림마당, 회향한마당 등 다양한 행사가 추가됐다. 박상희 전문위원은 “연등회가 이제는 봄철 대표적 축제로 자리잡았다”며 “어떤 사람들은 6개월 전부터 연등회를 준비한다고 들었다”며 웃었다. 그는 “연등회는 크고 화려하기보단 누구나 편안하게 와서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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