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3대 신용평가사가 알파벳 기호로 발표하는 신용등급은 애초 약속한 조건대로 원리금 상환능력이 있는지 일련의 기호로 나눈 것이다. 특히 단순히 원리금 지급 평가 이상으로 부실 징후를 선제적으로 감지하고 등급평가에 반영해 시장 전반으로 위험이 퍼지는 것을 막는 ‘워치독’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신용평가사의 수입원은 기업으로부터 받는 등급평가 수수료인 탓에 발행사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발행사 우위의 구조적인 문제가 오랫동안 지적되어온 이유다.
때마침 금융당국은 학계·시장전문가들과 함께 신용평가 선진화 방안 마련을 위한 전담팀(TF)을 가동, 오는 7월까지 관련 방안을 제시할 계획이다. 23회 이데일리 신용평가 전문가 설문(SRE)에서는 신용평가 선진화를 위해 언급되는 주요 방안에 대한 시장 평가를 들어봤다.
이번 설문은 시장에서 발행사 우위 구조 해소를 위한 대책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순환평가·지정제 도입 △투자자 지불모델 도입 등 수익구조 다변화 △임의(무의뢰) 평가 허용 △신평사 등록제 전환을 통한 신평사 추가 설립에 대한 개별 찬성·반대 의견을 물은 후 4개 가운데 가장 시급한 정책을 한번 더 선택하는 방법으로 진행했다.
설문결과 가장 도입이 시급한 정책으로 ‘임의(무의뢰)평가 허용’이 꼽혔다. 유효응답자 141명 중 48명(34%)이 ‘임의(무의뢰)평가 허용’을 선택했고 △순환·지정 평가제 도입 36명(25.5%) △신용평가사 등록제 전환 26명(18.4%) △투자자 지불 모델 도입 23명(16.3%) 순으로 나타났다.
개별 항목에 대한 찬반 설문에서도 임의평가는 78.7%의 찬성을 얻어 응답자 열 명 가운데 여덟명 꼴로 도입을 원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현행 금융투자업규정에 따라 신용평가사는 서면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용등급이나 특정 등급이 부여될 가능성을 담은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
증권회사가 상장기업에 대해 범위 제한 없이 매수·매도 의견을 낼 수 있는 것과 달리 신용평가사는 기업의 의뢰(수수료)를 받고서만 등급을 공표할 수 있다. 이러한 평가방법 제약은 발행자 우위 시장구조를 개선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신규 신용평가회사의 진입과 평가영역 확대를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제4신평 허용·무의뢰평가 ‘경쟁촉진’ 공통점
앞서 SRE는 지난해 하반기 실시한 설문에서 제4신용평가사 설립 찬반 의견을 물은 결과, 찬성 의견(56.6%)이 반대 의견(25.2%)을 압도한 바 있다. 한 자문위원은 “제4신평사 설립 허용과 임의평가 도입을 원하는 답변의 공통된 의미는 신용평가사들의 서비스 품질경쟁을 더 촉진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품질 경쟁 유도가 결국 선진화방안이라고 생각한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다른 자문위원은 “제4신용평가사가 시장에 진입해도 신규 평가사에 의뢰를 받으려는 곳이 드물 것이고, 투자자들도 그들의 등급에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며 “무의뢰평가가 가능해져야 신규 평가사도 등급을 계속 내면서 평판이 쌓아가며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기존 평가사들도 이러한 구도 속에서 투자자 신뢰를 얻기 위해 품질경쟁이 촉진되고, 그렇게 되면 등급 쇼핑처럼 기존에 제기되어온 문제도 무의뢰평가 도입을 통해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나온다.
다만 임의평가가 한편으로는 기존 신평사의 영향력 확대로만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제한적인 범위내에서 임의평가를 허용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행 의뢰평가는 기업(발행사)이 공시자료 외에도 분석에 필요한 재무자료를 제공해야지만, 의뢰없이 이뤄지는 임의평가는 분석자료 제공 의무가 없다. 이 때문에 “정보 부족으로 제대로된 평가가 이뤄질 지 의문”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특정 기업(발행사) 평가를 담당하는 신평사를 정기적으로 교체하거나 지정하는 ‘순환·지정평가제’는 찬성 71표(50.3%) 반대 67표(47.5%)가 나왔다. 순환·지정평가제 찬반의 논리는 비교적 뚜렷하다
순환평가제는 한 기업에 대한 등급평정을 신평사가 돌아가면서 하자는 방안이다. 신평사 간 일감 수주 경쟁을 제거하고 오로지 정확한 신용등급을 평가하는 데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기존 신평사의 혁신 동기를 제약할 수 있고 새로운 신평사가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애당초 막을 수 있다는 단점도 분명하다. 발행사 신용도의 지속적인 관찰이나 신용평가의 정교함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지정제는 특정 기업에 신용등급을 평가하는 회사를 금융당국이 지정하는 방식이다. 부실 기업이나 증권시장 상장을 준비하는 기업, 배임·횡령 등 경제범죄 사건에 연루된 기업 등 엄격한 회계감사가 필요한 기업에 대해 정부가 회계법인을 지정해주듯 신용평가에도 비슷한 원리를 도입하자는 안이다. 이 방안도 지정 절차의 공정성에 대한 시비가 있을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도입된 사례가 없는 만큼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발행사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은 분명하지만 반대로 현행 3사 과점체제에서는 되려 서비스 경쟁을 뒷걸음질치게 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 반대 의견에 녹아든 것으로 해석된다.
한 응답자는 “순환·지정평가제는 발행사 영향력을 약화시킨다는 순기능 때문에 찬성의견을 제시했지만, 도입시 신평사들이 투자자를 위해 노력하는 유인이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며 “앉아서도 순환평가로 일감이 주어질 텐데 굳이 힘들게 품질경쟁을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행 발행기업 지불모델(Issuer Pay Model)에서 탈피해 투자자 지불모델(Investor Pay Model) 도입 등 수익구조 다변화 방안에 대해서는 찬성 67표(47.5%) 반대 67표(47.5%) 기타 7표(4.9%)로 찬반 의견이 정확하게 갈렸다.
투자자 지불모델은 신평사가 발행기업뿐만 아니라 신용등급을 업무에 활용하는 채권시장 투자자로부터도 정보 이용료를 받아 이해당사자 간의 균형을 추구해보자는 논리다.
그럼에도 시장 전문가들 사이에서 찬·반 양론이 팽팽했던 것은 현실가능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무임승차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신용평가시장에서 투자자가 수수료를 지불하는 신평사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례가 거의 없는데다가 임의평가가 허락되지 않는 현행 3사 과점 상황에서는 더더욱 정착이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일단 현행 제도적으로도 투자자 지불모델 정착이 어렵다. 앞서 응답자 10명 중 8명이 찬성의견을 밝힌 임의평가제 도입이 먼저 이뤄져야 투자자 지불모델도 가능하다. 현 규정상 신평사가 신용등급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서면계약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발행기업이 아닌 금융투자회사의 의뢰로 신용평가가 이뤄지기는 하나 이는 자산유동화증권 발행시 신용등급 평가를 위한 것으로 발행기업 동의하에 이뤄진다.
투자자 지불모델의 찬반 양론은 시장투자자들의 속성을 반영한 결과라는 해석도 나왔다. 한 자문위원은 “투자자 지불모델 도입에 대한 찬성의견이 가장 적은 것은 관중으로서 즐기려 할 뿐 시장플레이어로 참여해 크레딧의 질적 수준을 높이려는 생각은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특정 투자자가 이용료를 내고 신용등급 정보를 활용한다고 해도 이 정보는 시장 내에서 빠르게 공유되기 때문에 무임승차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되는 제도를 고쳐 등록제로 전환, 더 많은 신평사가 존재하도록 하는 방안에 대해선 찬성 70표(49.6%) 반대 66표(46.8%)기타 5표(3.5%)로 역시 찬반 의견이 팽팽했다. 지난 22회 SRE에서 제4신평사 설립을 찬성하는 의견(56.5%)이 반대 의견(25.2%)보다 두 배 이상 많았던 것에 비춰보면 이례적 결과다.
기본적으로 신평사의 숫자보다는 질적 개선 자체가 중요하다는 점도 있지만, 응답자들마다 설문 문항에 대한 해석을 달리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현행 자본시장법과 시행령에서는 신평사 인가 조건으로 △50억원 이상의 자기자본과 대주주의 충분한 출자능력 △투자자·발행인 이해상충 방지 체계 △공인회계사 5명 이상과 증권 분석·평가업무 경력자 5명 이상을 포함한 20명 이상의 상시고용 신용평가 전문인력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번 설문은 이러한 현행법상의 인가조항을 갖춘 업체에 한해 등록제로 전환하는 것을 묻는 설문이었다. 일부 응답자는 “등록제보다는 일정요건을 갖춘 제한적 신규 허가를 통한 경쟁 유발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