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레슬러>와 <그랜 토리노>의 거리는 영화 속 캐릭터인 퇴물 프로레슬러와 한국전 참전 군인만큼 멀어보인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희생’을 테마로 하며, ‘옛날 남자’의 생존 방식을 그리고 있다. 아울러 미키 루크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두 배우의 개인 이력을 영화에 반영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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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슬러>의 랜디는 19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프로 레슬러다. 20년 후, 랜디는 진통제와 근육강화제에 의존해 간신히 링에 오르는 퇴물이 됐다. 동료와 팬들은 여전히 환호를 보내지만, 집세를 못내 낡은 트레일러에서 쫓겨나고 딸에게까지 무시당하는 서글픈 처지다. 유일한 말 상대는 역시 늙어서 인기 없는 단골 술집의 스트리퍼. 격렬한 경기를 마친 어느날 랜디는 로커에서 쓰러지고, 심장에 이상이 생겨 운동을 할 수 없다는 통지를 받는다. 하지만 최고의 흥행 카드였던 80년대의 숙적 아야톨라와의 재경기가 이미 예정된 상태다.
이 영화의 감독은 대런 아르노프스키(<레퀴엠> <천년을 흐르는 사랑>)지만, 영화를 지배하는 이는 배우 미키 루크다. 퇴물 레슬러의 귀환이란 소재는 루크의 개인사와 겹쳐져 묘한 울림을 준다. 루크 역시 80년대 최고의 ‘꽃미남’ 배우였으나 권투 선수로의 외도, 약물 중독, 폭력적인 사생활 등으로 인해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한 상태였다. 루크는 <더 레슬러>에서 “일생을 건 열연”(시카고 선 타임스)이라는 평을 들으며 재기에 성공했다. 올해 골든글로브에선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인 동갑 숀 펜은 수상소감을 통해 “미키 루크가 재기했다. 그는 내 형제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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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슬러>는 피흘리며 경기하는 랜디를 예수에 비유한다. 영화 속 가장 격렬한 경기 장면. 무대 위에는 철조망, 스테이플러, 철제 사다리, 유리판 같은 소도구가 놓여있고, 두 레슬러는 도구를 이용해 서로의 몸을 찢으며 싸운다. 스트리퍼는 랜디에게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의 고난을 그린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얘기를 하며, “예수가 2시간 동안 고문을 견딘다”고 말한다. 설명을 들은 랜디는 “남자답구먼”이라고 답한다. 랜디의 등에는 예수의 얼굴이 문신으로 새겨져있다. 예수가 대중의 죄를 대속해 십자가에 매달렸다면, 랜디는 피에 굶주린 관객을 위해 육체를 희생한다.
‘그랜 토리노’는 포드사의 72년산 자동차다. 오래됐지만 잘 관리된 이 자동차는 영화 속 주인공 월트를 은유한다. 한국전에 참전했으며, 50년간 일한 포드사에서 은퇴한 월트는 아내를 여의고 홀로 산다. 자동차 도시로 번성했던 디트로이트는 퇴락해가고, 아들은 일본차 딜러가 됐다. 옆집엔 베트남에 살던 소수민족인 흐멍족 일가가 이사온다. 보수적인 백인 노동자 월트는 무너져가는 미국의 윤리, 이민족이 들어찬 주변 환경이 못마땅하다. 월트는 동족의 갱들에게 협박받는 이웃집 소년을 우연히 구해준 뒤, 차츰 그와 우정을 쌓아간다. 그리고 ‘자기 집은 스스로 관리한다’ ‘약한 사람은 도와준다’ 같은 미국의 전통 윤리를 지킬 이는 다름아닌 이 소수민족 소년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이 윤리 덕목을 지키기 위해 월트는 자신의 몸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완고한 보수주의자 월트의 이미지는 이 영화의 주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과거 배역과 겹친다. <그랜 토리노>의 월트는 이스트우드의 70년대 히트작 <더티 해리> 시리즈의 폭력 형사가 은퇴한 뒤의 모습처럼 보인다. 법을 넘어 범죄자를 응징했던 과격 형사는 이제 자신만의 잘 가꿔진 집에서 타락한 세상을 한탄하며 조용히 늙어가는 노인이 됐다.
배우로선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그랜 토리노>에서 이스트우드는 자신을 집요하게 회개시키려는 동네 신부와 사사건건 마주친다. 처음엔 ‘가방끈 긴 27살 숫총각’에게 고백성사를 할 생각이 없다고 하지만, 결전의 순간이 오자 결국 신부를 찾는다. 고백성사를 하고 자신의 죄를 덜어낸 그는 이제 옆집 소년이 저지를지 모르는 죄를 대신하고자 한다.
만든 이의 인생관과 삶의 흔적이 묻어있을 때, 영화의 감동은 배가된다. <더 레슬러>와 <그랜 토리노>는 루크와 이스트우드의 분신 같은 영화다. 80년대의 미남자 루크와 70년대의 스타 이스트우드는 2009년의 영화를 통해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와 마주하며 미래를 준비한다. <더 레슬러>는 5일 개봉했으며, <그랜 토리노>는 19일부터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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