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의 창과 방패] 새해에 소망하는 삶

e뉴스팀 기자I 2021.01.07 07:10:34
[임병식 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 연휴 기간 중 네 명의 인물을 만났다. 책으로, 영화로, 그리고 직접 얼굴을 봤다. 조성녀, 박종철, 김우수, 성범영. 그들의 삶을 돌아보는 것으로 새해를 연다. 조성녀는 조 마리아 여사로 더 알려진 안중근 의사 어머니다. 또 박종철은 군사정권에 의해 고문으로 숨진, 80년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짜장면 배달부 김우수씨는 기부천사. 그리고 성범영은 제주도에 ‘생각하는 정원’을 일군 농부다. 성씨를 제외한 셋은 오래전 세상을 떴다.

제주에서 성범영 원장을 만났다. 그의 삶은 ‘우공이산(愚公移山)’으로 집약된다. 그는 일생을 세계 최고 정원을 가꾸는데 바쳤다. 1968년부터 외길을 걸었다. 황무지를 일궈 돌담을 쌓고 나무를 심고 분재를 키워 정원을 만들었다. 정원은 지난해 세계적인 여행 플랫폼 트립어드바이저로부터 ‘2020 여행자가 뽑은 상’을 받았다. 또 한국관광공사는 국제행사를 열기에 적합한 ‘유니크 베뉴’로 선정했다. 이곳에서 국제행사만 33차례 열렸다.

정원은 해외에 더 알려져 있다. 1995년 11월 장쩌민 중국 주석 방문 이후 공산당 고위 간부만 6만여 명이 다녀갔다. 중국인들에게는 필수 코스이고, 유럽인들에게도 핫 플레이스다. 반듯한 꼴을 갖추기까지 성 원장은 “미친놈” 소리를 들어가며 땀과 눈물을 쏟았다. 그 세월이 53년이다. 꿈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인생을 배우는 정원으로 만들어 세계인을 끌어 모으겠다.” 철학이 담긴 꿈이다.

김우수씨(54세 작고)의 삶은 영화다. 어린 시절은 고아원과 교도소에서 보냈다. 생을 마감하기까지는 짜장면 배달부로 살았다. 그가 아름다운 것은 진정한 나눔에 있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있으면서도 자신보다 어려운 이웃을 살폈다. 70만원 남짓 월급으로 무려 다섯 아이를 후원했다. 한 명이라도 더 후원하기 위해 야식 배달도 했다. 자신은 1.5평 고시원에 살면서도 아이들이 보내온 편지에 눈물 흘렸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해 생각했다.

박종철은 한국사회 전환점에서 독재정권에 의한 희생자였다. 군사정권은 21살 대학생을 불법 감금, 물고문하다 죽였다. 연휴동안 황호택 동아일보 전 논설주간이 쓴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을 읽었다. 박군 죽음은 6월 항쟁 불씨가 됐고, 결국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처음에는 쇼크사로 조작돼 묻힐 뻔 했다. 고문치사로 밝혀지기까지는 양심 있는 지식인들이 뒷받침됐다. 삼엄한 시절, 그들은 불이익을 마다하지 않았다.

죽음을 언론에 처음 알린 법조인, 보도지침을 어기고 보도한 언론인, 시신을 화장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채 부검을 고집한 검사, 부검 결과를 조작하라는 지시에 따르지 않은 국과수 의료인, 추가 고문 가담자를 교도소 밖으로 알린 정치인과 교도관, 그리고 이를 폭로한 종교인까지. 고비 고비마다 목숨을 건 저항과 분노가 역사의 물길을 바꿨다. 만일, 그들마저 눈감고 침묵했다면 역사는 더 많은 희생을 요구했을 것이다.

조 마리아의 삶은 노블레스 오블리쥐다. 조 여사가 보여준 처신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조 여사와 안중근 일가는 해주 일대 명문가였다. 그러나 안락한 삶을 뒤로한 채 독립운동이란 가시밭길에 들어섰다. 조 여사는 장남 안중근을 포함해 안성녀, 안정근, 안공근까지 4남매를 독립운동 제단에 바쳤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은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죽음을 구걸하지 말라고 했다.

안중근은 “나는 처음부터 무죄다. 무죄인 나에게 감형은 치욕이다”며 항소를 거부했다. 조 여사 또한 “사랑한다, 보고 싶다”가 아닌 “죽으라”는 편지를 보냈다. “네가 항소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뜨겁고 슬픈 편지가 아닐까 싶다.

우리사회가 혼란스럽다. 가치와 윤리기준이 흔들리고, 오만과 증오가 판을 치고 있다. 무책임한 정치에만 책임을 묻고 있기에는 시절이 빠듯하다. 스스로 돌아보고 중심을 잡는 게 중요하다. 옛 성현들은 신독(愼獨)이라고 했다. 조 마리아에게는 나라를 위한 뜨거운 헌신을, 박종철을 통해서는 억압과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저항과 분노를, 김우수를 통해서는 약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성범영에게는 흔들림 없는 의지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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