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도를 따라 오르는 등짐걸음은 ‘눈’이라는 한 단어부터 시작되었다. 저질의 체력이라도 설마 묻히겠나 싶어 그를 따라 나섰다. 8년만이다. 모두가 아침가리 계곡으로 넘어갈 때 월둔재 쪽으로 왔던 그 길을 계절이 수십 번 바뀌어서야 다시 왔다. 오래된 기억은 실낱같이 가늘어졌고 걸음은 처음 시작하는 백지장 걸음이다.
홍천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을 했으니 시작부터 늦었다. 해가 나지 않은 흐린 날이었지만 걷는 내내 쌓인 눈으로 인해 고개를 떨궈 발끝만 보고 걷기 시작했다. ‘쌓인 눈이 반사되어 시릴 정도로 눈이 아파서’라는 건 핑계였다. 고개를 들지 않은 건 한 눈에 봐도 쉬워 보이지 않는 까칠스러운 개인산 줄기의 위압감에서 자유롭고 싶어서였다.
간혹 고개를 들어보면 하나, 두울, 세엣, 한복 치마 주름 접히듯이 산자락이 접혔다. 월둔재 삼거리에서 구룡덕봉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르는 방향을 따라 계속 걸으면 아침가리가 시작되는 조경동교를 만나게 되지만 오늘의 목적지지가 아니기에 마음을 접는다. 느린 걸음으로 두어 시간동안 걸었으니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어깨를 쉬어주었다. 아무리 가볍게 패킹한다고 해도 50리터 동계 배낭은 물을 포함해 12kg 정도라 결코 가볍지 않다.
눈이 담뿍 쌓인 겨울 산. 나무가 겨울을 나기 위해 제가 가진 것들을 다 비워내는 나목이 되면 그 시린 몸뚱이를 감싸 안듯 하얀 옷으로 입혀주는 눈이 있어 겨울산은 더 멋있다. 반복되는 산허리 임도가 마술을 부리는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산은 생각보다 어둠이 빨리 찾아왔고 결국 배낭 헤드에 넣어 두었던 헤드랜턴을 꺼냈다. 그리고 정말 얼마 가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텐트 안에서 살짝 지퍼를 열고 밖을 내다보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얘기 한 자락, 사락사락 내리는 눈, 음악, 좋은 사람. 편하고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주어진 것에서 최대한 만족감을 느끼는 게 백패킹의 매력임을 우리는 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지만 자면서도 생리현상은 어쩌지 못하고 밤중에 텐트 밖으로 기어 나와 보니 눈이 제법 내린다.
정확히 1/2. 내 눈 앞에 펼쳐진 자연이 그린 그림의 비율이었다. 어제 저녁부터 내리는 눈은 모처럼 이쪽 산군을 덮어줄 모양인지 민둥머리 계방산 정상을 눈구름이 휘감았다. 우리가 어제 올라왔던 저쪽 어느 골짜기에도 하얗게 상고대가 피어났다. 텐트 뒤쪽으로 펼쳐진 방태산 자락과 그 너머 설악산에도 눈구름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모처럼 내리는 눈이 맨숭맨숭한 산을 덮어줄 모양이다.
마치 우리가 눈구름을 달고 온 듯 산 위부터 내리던 눈이 산 아래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눈 위에서의 하룻저녁은 세상이 보이든 말든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이었다. 계속 되는 오르막에 10% 체력이 끝까지 10%였던 구룡덕봉 가는 길이었지만 겨울이 이렇게 끝나간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아쉽지 않다. 눈과 함께 하는 달콤한 겨울의 아름다움을 맛봤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