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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명산으로 여겨진 인왕산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정과 백성에 끼치는 피해가 막심했다. 어진 왕(인왕) 세종이 개칭해서일까, 인왕산에는 동물의 어진 왕으로 일컫는 호랑이가 많이 살았던 탓이다. 호랑이가 얼마나 많았으면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 없다’는 속담이 전해질 정도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인왕산 호랑이가 일으킨 호환(虎患·호랑이에 당한 피해)이 다수 전해진다. 민가까지 내려온 호랑이가 백성과 가축을 죽여 피해가 막심했다. 인왕산 서쪽의 무악재를 넘어갈 적에는 10명씩 짝을 지어 꽹과리를 치면서 지나갔고 이들을 군사들이 호위했다고 한다. 어떤 학자는 조선 시대 호랑이한테 공격당한 백성의 비율이 지금의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보다 많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호환은 조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간이 큰 호랑이가 담을 넘어 궁궐까지 휘젓고 다녔다. 그래서 호랑이 포획은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일이었다. 왕까지 호랑이 사냥에 나섰고, 호랑이를 많이 잡으면 벼슬을 주거나 승급을 시켰다. 반대로 ‘인왕산 호랑이 포획을 소홀히 한 무관을 파직’한 기록(중종 실록)도 전해진다.
인왕산 호랑이의 호환은 조선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강감찬 장군이 인왕산에서 노승으로 변신한 호랑이를 물리쳐 쫓아냈다는 구전이 전해진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여하튼 당시에도 인왕산 호랑이가 백성에게 입히는 피해가 있었기에 내려오는 얘기일 터다.
산세를 보면 인왕산은 북악산에 미치지 못하고, 삼각산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인왕산에 호랑이가 많았던 이유를 물에서 찾는 시각이 있다. 화강암 덩어리인 인왕산은 열극수(암석을 거쳐서 솟아나는 물)가 흘러서 넘쳤다. 인근의 영천동 약수터, 옥천동 냇물, 냉천동 우물 등이 여기서 솟아난 물로 이뤄진 것들이다. 생명은 물이 없이는 살 수 없으니 호랑이가 인왕산을 찾은 자연의 섭리였다.
사람과 서식지가 겹친 호랑이는 불리한 결과를 받아야 했다. 나라가 나서서 잡아댔으니 인왕산 호랑이라도 배겨내지 못했다. 포획으로 잃은 짝을 그리워하던 수컷 호랑이가 괴로워하며 머리를 부딪쳐 죽은 자리는 지금의 인왕산 범바위로 남아 있다. 한국에서 호랑이가 포획된 것은 1921년 경북 경주가 마지막이다. 환경부는 1996년 한국에는 호랑이가 멸종했다고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