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신민당에서 여러 반독재 투사들이 나왔는 데 그 중 유명한 이들이 김영삼과 김대중이었습니다. 이 둘은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박빙의 승부를 겨루기도 했습니다.
신민당은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산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 당의 발자취는 남았습니다. 사실상 마지막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81년 단식을 하면서 전두환 정부에 항거했던 것이죠. 이 단식 투쟁은 1987년 민주화의 단초가 됩니다.
신민당을 거쳐간 인물 중에는 ‘위대하다’ 평가를 받은 인물도 있는데 바로 김홍일 장군입니다. 대표 대행을 포함해 정식 대표까지 맡았던 인물로 박정희 정권의 유신과 삼선개헌을 반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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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초기 한국군 양성에 힘을 씁니다. 1950년 6월까지 육군사관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다 한국전쟁 당시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긴급 투입됩니다. 그는 과거 야전 경험을 살려 1주일간 한강방어선을 지킵니다. 덕분에 미군이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됩니다.
초기 한국군 장교 중 몇 안되는 광복군 출신이고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모습을 평생 보여왔기에 군사정부에서도 호감을 보입니다.
실제 그는 1961년 5.16 쿠데타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고문과 군정 외무부장관을 지냈습니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박정희 정부로부터 받았습니다. 을지무공, 태극무공, 청조근정 등의 훈장도 수여됐습니다.
이후 1965년 박정희 정부가 한일협정을 체결하자 김 장군은 이에 반대했고 1968년 정계에 투신해 국회의원이 됩니다. 1970년 신민당 전당대회의장을 거쳐 1971년 신민당 당수(대표) 권한대행까지 맡았습니다.
김 장군은 만년에 광복회 회장을 맡아 활동했습니다. 독립운동 업적에 군사적 업적, 독재에 반대했다는 부분까지 후대에 귀감이 되는 것이죠. 지금 더불어민주당이 자신들의 계보를 앞선 신민당으로까지 끌어 올린다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민주당에서는 김 장군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이북5도청에서 열린 그의 43주기 추모제가 그 예입니다. 그의 아들 김덕재 씨와 박민식 보훈부 장관 등이 참석했습니다만, 민주당 당 지도부 혹은 민주당 의원 어느 하나 그 행사에 참여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뿌리가 한국 정당사에 있다고 본다면 앞선 신민당 시절 선배 정치인들의 발자취를 되새겨볼 필요도 분명 있어 보입니다. 상대 당에게도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역사로 말이죠. 그냥 잊혀지기에는 너무 아까우면서 위대한 ‘역사’가 김홍일 장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