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동재기나루터에서 유래한 동작구 동작동
나루터 마을, 국립서울현충원 들어서면서 자취감추고
한강다리 늘어가면서 나루도 기능잃고 폐지
창빈 안씨 묘, 현충원 이장하고 손자가 왕에 올라 명당 평가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한강에 다리가 없던 시절 배는 강을 건너는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었다. 배가 드나들기 시작하는 요지에는 나루가 생겼다. 한강 주요 나루 가운데 하나가 동재기나루다. 반포천이 한강으로 흘러드는 합류지에 있었다. 지금 행정 구역으로는 동작동에 속한다. 주로 경기 과천과 수원, 평택 등을 드나드는 이들이 이용했고, 나아가 호남과 충남 지역에서 한양을 오고 가는 이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 창빈 안씨 묘(사진=동작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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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재기라는 이름의 유래는 크게 두 가지가 전해진다. 과거 흑석동에서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넘어오는 강변에는 검붉은 구릿빛 돌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구리 동(銅) 자를 붙여 이름을 부르다가 동재기가 됐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노량진에서 사당으로 가려면 산머리를 돌아야 하는데, 이때 ‘돈재기’로 부르던 것이 동재기가 됐다는 것이다. 등재기나루는 한자로 동작진(銅雀津)으로 표기했고, 이게 동작리에서 동작동이 됐고, 1980년 동작구가 신설되면서 어원이 됐다.
1917년 한강인도교(현 한강대교)가 개통하면서 배는 더는 한강을 건너는 유일한 수단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동재기나루는 여전히 사람이 붐비는 교통 요지였다. 한강대교는 노량진 북단과 용산 남단을 잇는 다리였다. 여타 서울 모든 지역에서 한강대교를 이용하느니 차라리 나루를 통해 강 건너로 가는 편이 나았다.
한강에 다리가 하나둘 늘어가면서 결국 나루는 설 자리를 잃었다. 동재기나루는 1984년 동작대교가 개통하면서 아예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공교롭지만 동작대교는 동재기나루가 있던 곳에 지었다. 동재기나루뿐 아니라 광나루(광진교·천호대교), 삼밭나루(잠실대교), 뚝섬나루(영동대교), 한강나루(한남대교), 서빙고나루(반포대교), 마포나루(마포대교)가, 양화나루(양화대교·성산대교)가 다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한강 남북을 잇는 주요 지점이 나루였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 법정동으로서 서울 동작구 동작동 범위.(사진=네이버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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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동작구 동작동은 대부분이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채워져 있다. 애초 동재기나루를 끼고 마을 형성돼 있었는데 1954년 국립서울현충원이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국립서울현충원 터는 명당으로 평가받았다. 조선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는 1549년 숨지고 경기 양주에 묻혔다가 이듬해 과천현 동작리(현 동작구 동작동)로 이장됐는데, 이후 손자 하성군이 선조에 올라 왕이 됐기 때문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을 조성하면서부터 터에 창빈 안씨 묘가 있었던 까닭에 현재도 같은 위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