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창용의 공간·공감] 경계, 거리 그리고 2018

남궁민관 기자I 2018.04.28 12:44:48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7일 경기도 파주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만나 인사 나누고 있다.(사진=뉴시스)


[현창용 Architects H2L 대표] 전깃줄에 앉아 있는 새들을 올려다 보면 약속이나 한 듯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앉아 있을 것이다. 스위스의 동물행동학자 하이니 헤디거는 모든 동물은 각자의 영토를 영위하고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깃줄 위의 새들 역시 본능적으로 각자의 영역을 알고 경계를 만드는 습성이 반영된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구석을 찾는다. 다른 사람이 들어왔을 때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가끔 텅 빈 지하철을 탈 때도 언제나 가장 끝 좌석이 인기다. 한쪽이라도 타인과의 경계를 만들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인간도 어쨌거나 온도와 체취를 가지고 있는 동물이기에 누구나 나 이외의 모든 사물, 동물과의 거리가 필요하고 그 거리의 끝 지점에 경계를 만들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건축가들은 이러한 ‘인간의 거리’에 대한 공간적 학습을 바탕으로 설계를 진행한다. 이러한 감각들을 정의한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동물보다 조금 더 세분화된 거리가 존재한다. 홀은 이를 4가지의 거리와 경계로 분류하는데 각각 밀접거리, 개체거리, 사회거리, 공공거리라 명명한다.

‘밀접거리’는 상호간의 ‘에너지’가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거리다. 그중 ‘가까운 밀접거리’는 호흡, 체온이 맞닿아 느껴지며 음성이 필요 없는 거리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면 될 것인데, 사실상 ‘거리’라 부를 수 없는 관계다. 이로부터 조금 떨어져 15~45㎝의 거리가 유지되는 상태를 ‘먼 밀접거리’라 정의하는데 이 때는 음성이 사용되지만 낮은 속삭임도 가능한 거리다. 이런 밀접거리는 사실 배타적 경계가 형성되진 않을 것이다.

밀접거리로부터 조금 멀어지면 ‘개체거리’와 ‘사회거리’가 형성된다. ‘개체거리’는 보통 45~100㎝ 정도를 의미하는데 작은 방어영역을 만들 수 있는 거리를 의미한다. 즉 상대가 손과 발을 뻗었을 때 나에게 닿을 수 있는 한계점 언저리다. 이때부터 인간에겐 약하나마 ‘경계’가 발생한다. 우리가 엘리베이터에서 구석을 찾은 것은 개체거리를 확보하기 위함이고, 지하철 끝자리가 좋은 것은 밀접거리를 한쪽이나마 만들지 않기 위함인 셈이다.

‘사회거리’ 중 가까운 사회거리는 1.2~2.1m 정도다. 이 거리에서는 손발을 뻗어 닿지 않고 악수를 하려면 허리를 내밀어 다가가야 한다. 하지만 표정은 명확히 보이고 얼굴 근육의 변화도 똑똑히 볼 수 있다. 이 거리 안에서는 특히 시선을 위·아래로 조금만 움직여도 상채까지 포착되는데, 이는 상대의 태도를 쉽게 감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거리에서는 매우 복잡한 일들이 이루어지는데 상대를 파악하고 또 내 입장을 전달할 때 사회거리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보다 멀어지면 ‘공공거리’의 범주에 속한다. 서로간의 간섭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표정도 읽을 수 없게 된다. 타인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느낄 수 있게 되며 서로의 소통은 불가능하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7일 오후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산책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이처럼 인간은 관계에 따라 경계를 만들며 거리를 유지한다. 인간과 인간이 만든 수많은 경계들, 그 중 2018년 봄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경계가 있다. 바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판문점 군사분계선이다.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과 개성시 판문군 판문리라는 같은 공간, 두 개의 이름이 부딪혀 만들어진 경계.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그 경계를 넘었다. 두 정상의 만남의 과정을 보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어떤 경계들을 넘나들며 소통했는지, 그 소통의 의미는 무엇인지도 짐작해볼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북측 판문각 정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측에서 볼 때 아마도 ‘공공거리’ 정도의 거리감이다. 아직은 그의 표정이 정확히 관찰되지 못하는 곳에서 역사적인 만남은 시작됐다. 도보로 다가와 판문점 T2와 T3사이의 얕은 화강석 턱을 넘어 문대통령과 손을 잡을 때까지 두 정상은 ‘공공거리’에서 ‘개체거리’로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악수란 두 사람이 개체거리를 서로 용인하는 상징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후 두 정상은 회담장이 있는 평화의 집으로 향했다. 두 개의 다리가 하나로 합쳐지는 형태를 상징해 제작된 회담 테이블, 2018㎜의 폭으로 제작돼 더욱 화제가 된 그곳으로 말이다. 특별 제작된 회담 테이블의 폭은 올해를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하지만 공간적으로 그 장소에서 일어나는 소통행위의 목적에 맞는 ‘사회거리’를 발생시키는 숫자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대로 홀은 사회거리를 1.2~2.1m로 정의한 바 있다. 양측이 마주앉은 거리를 사회거리의 범위에서 가장 먼 2m 언저리로 잡은 것은 실질적인 회담 성과가 결정될 중요한 자리의 긴장감을 대변하는 거리인 셈이다. 작은 표정과 제스쳐의 변화마저 쉽게 인식될 수 있는 거리에서 양측은 회담의 성과를 신중하게 만들어 갔다.

이후 오찬과 공동식수 행사를 거쳐 두 정상은 도보다리 산책했다. 다른 수행원 없이 두 정상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평화의 집에서 사회거리를 두고 주고받은 긴장을 내려놓고 ‘먼 밀접거리’까지 가까워졌다. 외부에 들리지 않는 속삭임도 가능한 거리에서 남과 북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밀접거리 범위에서 나누는 대화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같은 날 저녁녘이면 김위원장은 다시 북으로 넘어갔다. 한 걸음이면 넘어갈 수 있는 그 화강석 턱을 성큼 건너갔다. 남으로 넘어와 다시 북으로 넘어가기까지, 두 정상은 다양한 차원의 ‘인간의 거리’를 형성했고 ‘이념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통했다. 한반도의 모든 경계의 높이가 낮아지기를, 민족의 거리가 좁혀지기를 기대하고 염원한다.

현창용 Architects H2L 대표.
☞현창용 대표는?

- 현(現) Architects H2L 대표

- 현 중앙대학교 건축학부 겸임교수

- 건축사/건축학박사/미국 친환경기술사(LEED 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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