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철의 트렌드읽기]종이, 공감을 담아내다

박병철 기자I 2012.10.11 09:15:26
[이데일리 박병철 칼럼니스트] 최근 몇 년 간 건강과 여가, 환경에 대한 관심사가 높아지면서 패션 시장이 동일한 이슈로 맞물렸다.

대표적인 것이 ‘아웃도어’다. 아웃도어 제품은 ‘집’이라는 환경을 벗어나 ‘스스로 안전하게 생존하기’ 위한 기능성을 기본으로 한다. 그래서 영하 몇 도까지 버틸 수 있는지가 제품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또한 격렬한 스포츠 활동을 할 경우에 생기는 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이를 테면 땀을 빠르게 흡수하게 하거나 땀을 바깥으로 배출하고 바람을 막아 체온을 떨어뜨리지 않게 하는 식이다.

이처럼 최근 들어서는 브랜드와 제품 디자인의 관심을 넘어서 기능과 소재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고급 소재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옷에 관심이 많은 한 취업 준비생에게 “수트는 150수 이상은 입어야 하죠?”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또 유명 백화점의 매장 담당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백의 가죽이 어떤 것이 더 고급인지 고객들이 매우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업계 종사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전문 지식과 견해를 충분히 가지고 있어 어떤 이슈가 생기면 활발한 의견 교환도 이뤄진다. 작년 대한민국 대표 여자 연예인이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피를 입지 말자고 제안한 것도 한 예다. 이런 의견이 공개되자 마자 그 연예인이 과거 가죽제품을 입은 사진들이 온라인 상에 올라오는 등 다소 거친 의견의 충돌도 있었다. 참 예민하고도 어려운 얘기다.

아이러니컬한 경우도 더러 생긴다. 한 유명 디자이너는 모피와 가죽을 사용하지 않는 동물애호 운동가로 합성수지를 사용한 페이크 가죽을 사용해 제품을 디자인해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반면 분해되지 않는 합성 수지 소재들이 땅을 오염시키는 것을 우려하는 환경운동가의 입장에서는 합성 수지로 만든 소재들이 거북하게 느껴질 것이다.

‘잘못하고 있다’라는 표현이 합당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각각 사람들이 의견을 표현할 때 주관적 견해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모피와 가죽의 가공방식이 분명히 다르고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선택한 합성수지 소재가 지구를 더 오염시킬 수 있다는 것 모두 다 사실이다.

여차 저차한 사정들로 갑론 을박할 때 ‘미니멀리즘의 미학’ ‘간결한 표현’ 등으로 유명한 독일의 디자이너 브랜드가 올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소재의 백을 선보였다. 그 소재는 바로 ‘두꺼운 종이’였다. 종이는 식물 섬유로 만든 것으로 글을 쓰고 인쇄하는 용도나 쇼핑백 정도로 사용돼 왔다.

많은 패션 피플들을 열광시킨 종이 백의 디자인은 필자를 더 놀라게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수퍼마켓의 종이 봉투와 동일한 볼품 없는 디자인 같아 보이지만 독특한 소재와 사이즈, 바느질과 디테일에서는 이유 있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트렌드를 이끌어 가는 리더들은 운동(Movement)을 통해 호소를 일으키려고 하기 보다 방향성을 보여주고 공감을 끌어 낸다. 모델의 손에 말아 쥔 형태로 들려진 평범한(물론 디자이너의 로고가 잘 보이도록 인쇄되어 있다) 종이 백이 많은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영향을 주고 또 좇아 가게 만든다는 것. 그것이 진정한 트렌드 리더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가격은 일반 종이 봉투의 3000배 이상이다. 하지만 살까 말까 고민할 필요는 없다. 3주 만에 이미 완판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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