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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찾아서)⑧신뢰위기가 경제위기다

김기성 기자I 2008.12.29 09:57:48

외환위기 버금가는 위기..섣부른 낙관 금물
위기는 기회..신뢰회복이 목표달성 첫걸음

[이데일리 김기성기자] '가동중단, 감산, 감축, 공포, 추락, 비상경영···'
한국 경제 현장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말들이다. 그만큼 경제흐름이 만만치 않다.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옮겨가면서 산업 현장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다. 수출과 내수 모두 빨간 불이 들어오면서 IMF 외환위기 이후 10년여만에 찾아온 위기라는 말을 실감나게 하고 있다. 모두들 내년이 더 걱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위기를 직시하되 희망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목소리도 높아가고 있다. 우리는 달러가 없어 부도 직전까지 몰렸던 나라를 수년만에 세계 5대 외환보유국으로 바꾼 저력을 발휘했다. 세계개발은행은 이를 '기적'이라고 평가했다. 

기적은 또 있다. 전쟁 폐허를 겪은 세계 최빈국을 수십년만에 메모리반도체· LCD· 디지털TV· 조선 세계1위, 조강(철강)생산 세계5위, 자동차생산 세계6위의 10대 세계경제대국으로 탈바꿈시키는 힘을 보여줬다. 

희망이 없으면 노력도 없다고 했다. 희망만 가지면 그곳에서 행복의 싹이 움튼다고도 했다. 위기가 불러오는 불안속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외환위기를 극복해 낸 경험이 축적돼있고, 10년전에 비해 크게 개선된 산업경쟁력과 기술력, 우수한 인재를 자산으로 보유하고 있다.

이제 그 자산을 써 볼 '기회'가 왔다. 위기는 곧 기회다. 희망을 이야기하고,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땀 흘린다면 위기극복이라는 알찬 열매가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편집자>

 
 
지금의 경제위기를 놓고 과거 IMF 외환위기 당시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이 될 것이라는 말들이 자주 나온다. 외환보유고나 기업 및 은행의 건전성 지표는 그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돼 있다. 하지만 팽배해지고 있는 우려감은 단순한 엄살만은 아니다.
 
그 배경은 미국발 금융위기로 촉발된 세계 경제위기의 본질에서부터 출발한다. `실물경제와 심각하게 괴리돼있는 금융버블이 터지면서 누구도 믿지 못하는 신뢰의 위기를 낳았다`는 것이 주된 진단이다.
 
이로 인해 신용을 바탕으로 한 돈줄(유동성)이 막혀버렸고 단숨에 글로벌 금융위기로 확산됐다. 급기야 글로벌 실물경제의 극심한 침체로 전염된 상태다. 내년 미국과 유럽등 선진국 경제의 역(-)성장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은 실물경제 위기의 심각성을 대변해 주고 있다.

`글로벌 금융경제와 실물경제의 동반 침체`라는 지금의 위기상황은 단기간내 해결되기 힘든 구조다. 우선 진원지가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 그것도 세계 금융의 핵인 월가라는 점에 있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불확실성이 과거의 국지적인 위기 상황과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고, 과거의 구원군이었던 선진국들이 `제 코가 석자`인 실정이다.
 
특히 지금의 위기가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세계화된 금융시장의 붕괴`에서 촉발됐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각 국 정부가 유례없는 경기부양책을 쏟아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실물경제의 젖줄인 금융시스템이 이미 심각하게 손상됐다는 증거다. 금융의 몰락이 금융 자체로 끝나는 적은 없다. 앞으로도 험난하고 긴 여정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눈을 안으로 돌려보자. 우리나라 경제가 11년전 외환위기 이후 최대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 결과 반도체, 자동차, 철강, 조선등 우리 경제를 이끌고 있는 주요 업종은 잇따라 감산에 나서는 등 생존책 모색에 고심하고 있다. 반토막난 주가와 부동산경기 침체, 감원 태풍 등으로 국민들의 시름소리는 커져만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대외환경을 신속하고 냉철하게 진단하기 보다는 대통령 핵심 공약인 `747`(연간 7% 성장, 10년내 국민소득 4만달러, 10년내 7대 강국)에서 비롯된 성장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모습을 줄곧 보여왔다.
 
경제부처 장관들의 일관성 없고 설익은 발언들이 금융시장 불안을 가중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국회는 대화와 타협이라는 의회민주주의 원칙을 나몰라라하고 망치와 톱까지 동원하는 난장판을 연일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위기가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와 무관한 측면도 있지만 과거의 외환위기라는 뼈저린 아픔을 경험하고도 정부와 국회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 때는 늦지 않았다. 위기는 위험인 동시에 기회다. 특히 과거와는 달리 전세계 모든 국가와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 경제와 기업이 글로벌 강자로 부상할 수 있느냐는 지금부터가 관건이다. 그중에서도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 회복이 첫 걸음이 될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 IMF 외환위기 버금가는 위기상황..섣부른 낙관은 금물

미국 4위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의 파산보호 신청으로 유동성위기는 신뢰위기로 진화했다. 리먼의 파산은 어떤 기업도 파산의 가능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
 
신뢰위기란 신용위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금융기관이나 기업에 대한 거래 자체가 위축되는 현상이다. 넓게 보면 외환위기 가능성이 있는 국가까지 포함한다.  

문제는 신뢰위기가 유동성 위기와는 달리 구체적인 부실이나 위험 보다는 공포나 위협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부의 지원 규모가 아무리 크더라도 시장 신뢰가 형성되지 못한다면 금융불안이 해소되지 않는 국면이다.  

다행스럽게도 12월들어 우리나라의 주가, 원화가치, 채권값 등 이른바 `트리플 강세`가 이어지는 등 금융시장이 다소 안정을 찾는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가 단기간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금융위기의 불씨가 여기저기에 도사리고 있는데다 실물경기 침체라는 더 큰 걱정거리가 코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다. 세계 경제가 침체되면 수출길이 막혀 어려움이 가중될 수 밖에 없다. 또 수출이 타격을 받으면 내수경기도 함께 침몰한다. 그 징후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4분기들어 기업매출은 급감하고 있고 제조업 재고율은 10년만에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11월 수출은 19%나 줄었고, 12월의 감소폭은 더욱 가파를 전망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최대 수출시장인 중국의 수출이 급감하고 있어 우려감은 증폭되고 있다. 현지 진출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수출용 중간재가 대중국 수출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중국의 수출 급감은 우리 수출의 심각한 어려움을 예고하고 있다.  

그렇다고 내수가 버팀목 역할을 해줄 상황도 아니다. 676조원에 달하는 가계부채가 소비의 발목을 잡고 있고, 주가와 부동산가격의 급락은 역(-)의 자산효과로 작용하고 있다. 

◇ 컨트롤타워 없는 경제팀..엇박자의 연속


한때 우리나라의 부도 가능성을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왑(CDS) 프리미엄이 태국보다 낮고, 베트남과 비슷해지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연출된 적이 있다. 그 당시가 정부의 신뢰성이 쉴새없이 도마위에 올랐던 때라 상당부분의 화살은 정부를 향했다.

정부에 대한 불만은 기대와 실제가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정부가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성과를 도출하지 못했을 때 불만은 커지는 반면 정부가 일을 잘하면 만족도는 함께 올라간다. 불행하게도 이명박 정부에 대한 평가는 전자에 속한다.

돌이켜보면 현 정부의 신뢰 위기는 정권 출범과 함께한다. `747공약`의 현실성을 비롯해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둘러싼 잡음, `고소영` `강부자`로 대변되던 첫 내각 등으로 정부에 대한 신뢰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급기야 국민적 신뢰를 얻지 못하고 추진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수개월동안의 촛불집회로 귀결됐다. 현 정부는 임기 1년차에 국정 우선순위 부각에 실패했고, 시장 개혁을 이념공방에 휩쓸리게 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에 "지금은 IMF 외환위기와는 다르다"고 말했던 대통령이 `총괄적으로 지금 상황이 IMF 때보다 심각하다"고 말을 쉽게 바꾸는 등 대통령과 경제부처 수장들이 낙관과 비관 사이를 오가면서 신뢰의 위기를 자초한 측면도 적지 않다.
 
특히 경제정책을 효율적으로 조정하는 경제팀의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비난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이같은 상황들을 곱씹어보면 성장 중심의 패러다임에 기반한 정책들을 국민적 공감대 없이 밀어붙였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내년 상반기 마이너스 성장 가능성이 있다"는 대통령의 최근  발언 처럼 지금은 `시계 제로(0)`의 상황이다. 전망이 무의미할 정도로 불확실성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그래서 경제성장률이 몇%가 될 것이냐를 갖고 힘을 허비할 때는 지났다.

대부분의 연구기관들은  내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전망치의 하향 조정을 검토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책적 효과 1%포인트를 합쳐 3% 성장을 달성하겠다는 정부의 발표는  현실성이 없다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각오만은 칭칠할만 하다. 하지만 그러한 목표를 합리화하기 위해 정책적 무리수를 둘까봐 걱정하는 시각이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정부도 할말은 있다. 워낙 국제금융시장이 급변하고 있어 일사불란하게 대처하기 힘든 측면도 있고, 문제 없다고 말하면 안이하다고 비판하고, 선제적인 조치에 나설 경우에는 얼마나 어렵기에 그러느냐는 반응이 나오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도 `정부의 발표를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불신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부터는 솔직하고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 상황에 맞춰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은 현 정부가 공언한 `실용`의 철학에도 부합한다. 이러한 상황인식의 변화가 정부의 훼손된 신뢰를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 위기는 기회..신뢰회복이 목표달성의 첫걸음

지금의 우려대로라면 세계 경기침체가 내년에 그치지 않고 장기화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정부의 역할이 그 어느때 보다 중요한 이유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한 상황에서는 민간부문의 투자와 소비가 자생적으로 늘어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위기일수록 정부 정책의 신뢰확보가 중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문이다. 다름아닌 정책의 일관성이다. 거시정책, 부실기업 구조조정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관계부처간 일관된 정책적 목소리가 나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기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리더십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 선제적이고 과감한 정책 실행이 가능하다.

더 나아가 전문가들은 위기 이후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충분히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의 경우 IT 버블 붕괴 이후 저금리 기조를 너무 오랫동안 유지한 것이 부동산 버블을 야기시켰고, 결국 서브프라임 위기의 단초를 제공했다. 

경제위기 뒤에 펼쳐질 새로운 패러다임은 언제나 새로운 강자 탄생을 예고해 왔다. IMF 외환위기가 삼성 현대차 포스코와 같은 초일류기업을 키워내는 계기가 됐듯이 이번 위기도 마음먹기에 따라 우리나라 경제와 기업이 글로벌 강자로 부상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월가의 투자은행들과 자동차 빅3가 몰락하거나 몰락의 기로에 서있는 대격변의 시점이다. 위기를 기회로 살릴 수 있는 길은 열려 있다. 그러한 목표 달성은 지금부터라도 정부하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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