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약으로 배 채우는 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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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기자I 2025.09.04 05:00:00

김정하 중앙대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교수
주치의·약사와 함께 필요한 약 점검 필요
불필요한 약 한 알 줄면 부작용 위험 ‘뚝’

[김정하 중앙대 의과대학 가정의학교실 교수] 85세 어르신이 휠체어에 앉아 조는 듯이 내원했다. 부인은 남편이 기운이 없고 기억력이 떨어지며 자주 졸고 손을 떤다고 걱정했다. 환자는 잠을 못 자고 입맛도 없고 속이 더부룩하다고 호소했다. 환자는 서로 다른 다섯 의료기관에서 스물일곱 개의 약을 복용 중이었다. 약물을 검토해보니 위산분비억제제와 소화제 등 소화기계 약이 여섯 가지 겹쳐 있었고 항불안제와 수면제를 포함한 중추신경계 약이 7개, 마약성 진통제를 포함한 진통제를 5개나 동시에 투여하고 있었다. 여기에 항콜린 작용이 강한 배뇨장애 약물까지 더해져 어지럼증, 졸림, 낙상, 인지 저하 위험이 크게 커진 상태였다.

김정하 중앙대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교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75세 이상 노인의 64%가 5개 이상의 의약품을 복용한다. 5개 이상 약물 복용이 일반적으로 다제약물의 기준으로 제시되는데 많은 연구에서 처방받은 약의 개수가 늘수록 약물 부작용·입원·사망 위험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경고를 내놓는다.

약을 세 알만 복용하고 있다고 해서 안심하기는 이르다. 여기서 다섯은 성분 수를 말한다. 요새는 약물 복용의 순응도를 높이기 위해 한 약물 내에 여러 성분의 약을 포함한 복합제가 흔히 사용된다. 약물 한 알에 네 가지 성분의 약이 들어 있기도 하니 실제 복용 성분은 훨씬 많아질 수 있다. 특히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진료지침에는 이들로 인한 합병증을 예방하기 위해 서로 다른 기전의 약물을 병용 투여해 치료 목표를 달성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여기에 병·의원을 자유롭게 오가는 의료 환경이 겹치면 처방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처방을 ‘적절한 다제약물’과 ‘불필요한 다제약물’로 구분해 주기적으로 검토하고 조정할 것을 권한다. 여러 가지 약을 반드시 꾸준히 잘 복용해야 하는 ‘적절한 다제약물’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약의 개수가 많아지면 그 안에 줄이는 것이 이로울 수 있는 약물이 포함될 가능성 또한 커지게 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시행 중인 약사·간호사·의사 협업의 다제약물관리 시범사업 결과를 보면 시범사업에 참여한 28개 병원(17개 상급종합병원 포함) 환자 2364명 중 30.9%에서 1인 평균 2.5건의 약물 조정을 보고한 바 있다.

특히 다제약물 복용은 노인에게 더 위험하다고 알려져 있다. 나이가 들면 약을 흡수하고 분해하고 배출하는 몸의 능력이 떨어진다. 예를 들어 진정·수면제인 디아제팜은 같은 용량이라도 노인에게서 혈중 농도가 더 오래, 더 높게 유지돼 혼동, 호흡 억제, 낙상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런 약은 ‘노인주의 약물’로 분류된다. 문제는 환자나 가족이 직접 약 목록을 평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결국 지속적으로 진료받고 있는 주치의와 상담이 필요하다. 주치의가 주기적으로 검토할 수 있도록 본인의 모든 사용 약물에 대해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고 스스로 건강상태와 약물을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약물 감량이나 약물 중단이 가능할 수 있다.

앞서 27개 성분의 경구약을 복용 중이던 85세 어르신은 수개월에 걸쳐 18개 성분으로 줄였다. 여전히 많은 약제를 복용 중이지만 이제는 휠체어 없이 스스로 걸어서 외래에 내원해 의료진을 깜짝 놀라게 한다. 환자의 기력과 손떨림, 불면이 현저히 나아졌다. 무엇보다도 환자가 또렷해졌다고 보호자가 매우 기뻐했다.

세계보건기구는 2017년 ‘안전한 약물 사용’(Medication Without Harm)을 세 번째 환자 안전 도전 과제로 제시하고 예방 가능한 약물 위해를 반으로 줄이자는 목표를 세웠다. 우리 역시 ‘필요 없는 약 한 알 줄이기’에 나서야 한다.

약은 ‘정확히, 필요한 만큼’ 복용할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다만, 의사·약사와 상의 없이 임의로 끊지는 말자. 오늘, 나와 부모님의 약 봉투를 펼쳐 꼭 필요한 약이 몇 가지인지 함께 점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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