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우리나라 노인 빈곤율 상승 속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빠르다. 노인 빈곤율 자체도 압도적으로 부동의 1위다. 고령화 속도 역시 세계에서 가장 빨라 차분하게 관련대책을 마련할 여유도 없다. 갈 곳 없는 고령자 즉 노후 난민이 양산될 가능성이 크다. 은퇴 이후 경제적인 자유가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공적보장 시스템은 고령화와 저성장의 틀에서 재정적 한계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에 민영보장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노후 난민 문제와 같은 새로운 고령화 위험에 공사가 긴밀히 협력해 대응해야 할 시점이다.
[이데일리 문승관 기자] “윌세 17만원에 서울에서 살 만한 곳은 이곳 정도밖에 없을 거요.”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한 쪽방촌. 10㎡(약 3평) 남짓한 방 안은 한 사람 누울 공간에 침실과 무늬뿐인 욕실 역할을 겸하는 부엌으로 단출하다. 이곳에 산 지 10년째라는 김성진(가명·65) 씨는 평일에는 인근 동대문역 주변과 동묘 인근을 오고 가며 폐지를 줍고 있다. 김 씨는 10여 년 전 사업 실패로 가족과 헤어진 뒤 쪽방촌으로 오게 됐다. 지금은 심한 관절염 때문에 거동이 불편하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선 아픈 다리를 이끌고 하루에 12시간 동안 폐지 줍기를 할 수밖에 없다. 매월 기초생활수급비로 받는 48만원에 폐지 줍기로 받는 15만원을 합해야 63만원이 한 달 벌이다. 방값 17만원 내고 약값, 식대, 난방비 등을 지출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듯 은퇴 이후 행복한 노후를 보내는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도 있지만 ‘9만 시간(퇴직 이후 주어지는 여유시간)’을 미리 대비하지 못해 외로움과 고통에 시달리는 은퇴자를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베이비부머 이전 세대인 60~70대 노인들은 대부분 노후설계에 대한 개념조차 모른 채 노년을 맞이한 경우가 많다. 자식 뒷바라지에 모든 것을 걸었지만 핵가족 문화에 익숙한 자녀로부터 외면당하거나 버림받기도 한다.
‘100세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의·식·주 등 최소한의 생활 여건이 충족되지 않아 발생하는 ‘노인 빈곤’ 문제는 난제다. 전문가들은 ‘빈곤’ 해결이 국가 주도 정책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은 48.8%로 노인 2명 중 1명이 빈곤 상태에 처해 있다. 10년 전인 2007년 44.6%에서 4.2%포인트나 상승했다.
◇턱없이 낮은 노후소득원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지난 8월 말 주민등록 인구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는 약 725만 명으로 전체 인구(약 5175만 명)의 14%다. 특히 혼자 사는 우리나라 독거노인은 2015년 122만명에서 2017년 133만명으로 최근 3년간 10%가량 증가했다.
독거노인이 343만명에 달할 것으로 예측되는 2035년에는 저출산이 심화하면서 자녀로부터 봉양 받지 못하는 노인의 고독사가 더욱 증가할 전망이다. 은퇴 이후 경제적인 자유가 절실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은퇴가구 4가구 중 1가구(23%)는 연금소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가 최근 서울과 5대 광역시에 거주하는 25~74세 남녀 비 은퇴자 1771명과 은퇴자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공적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의 3층 연금 모두를 받고 있는 은퇴가구는 4%에 불과했고 은퇴가구의 과반수(53%)는 3층 연금 중 하나만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윤원아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길어진 은퇴기 동안 안정적인 소득을 얻기 위해서는 은퇴 3층 연금을 준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달 초 한국 FP(재무설계) 학회와 최현자 서울대 교수가 함께 조사·발표한 ‘행복수명지표를 이용한 노후준비 수준 국제비교 연구’에서 노후에 예상되는 치료비와 중증 간병비 예상 지출액이 연간 1만5000달러(약 1700만원)로 미국(1만8000달러) 다음으로 많았다.
하지만 예상 연금수령액은 5개국 중 최저 수준인 월평균 756달러(약 85만원)에 불과해 노후에 안정적 소득과 치료비 확보가 어려울 것으로 분석됐다.
최현자 서울대 교수는 “한국은 5개국 가운데 행복수명이 가장 짧고 모든 영역에서 노후준비 상태가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선진국보다 부족한 금융·연금자산을 늘려 안정적인 노후소득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늙는 게 두렵고 불행하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올해 초 발표한 경제행복지수에서 우리 국민이 느끼는 경제행복지수는 5년 만에 최저치인 38.4점을 기록했다. 60세 이상 고령층으로 갈수록 행복감이 크게 낮아졌고 경제적 행복의 가장 큰 장애물로 ‘노후준비 부족’을 꼽기도 했다.
백흥기 현대경제연구원 본부장은 “60대 이상은 대부분 은퇴 이후 소득이 매우 감소한 상태로서 노후준비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며 “50대 역시 은퇴를 했거나 은퇴를 앞두고 있어 경제적 행복감이 떨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노후준비 부족으로 생애 마지막 8년 정도를 불행하게 살 수도 있다는 ‘경고’도 제기됐다. 한국 FP 학회 연구에서 20~50대 경제활동인구 행복수명은 독일 77.6세, 미국·영국 76.6세, 일본 75.3세, 한국 74.6세 순으로 5개국 중 한국이 가장 낮았다.
우리나라는 경제적 노후준비를 중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5개국 가운데 가장 많았지만 경제 수명과 기대수명 간 차이가 6.1년으로 가장 큰 격차를 보였다. 세상을 뜰 때까지 6년 이상 노후 빈곤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N포 세대’ 노후준비는 그림의 떡
지난 2014년 영국의 여론조사 기관인 ‘입소스 모리(IPSOS MORI)’가 최근 세계 20개 나라 성인들에게 물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될까?” 답을 취합했더니 30대 이하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었다. 프랑스 젊은이 중 69%는 미래의 삶이 나빠질 것이라 답했고 한국도 비관적이라는 답이 40%로 낙관적이라는 34%보다 높았다. 이처럼 젊은 세대의 은퇴 후 삶의 질 문제는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의 설문 조사한 결과 20~30대 이른바 ‘N포 세대’의 84.5%가 은퇴 후 필요소득을 계산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노후 준비 계획 자체가 이들에겐 그림의 떡인 셈이다.
윤원아 책임연구원은 “20대는 취업이 어렵고, 30대는 가족확대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내 집 마련과 자녀 교육비 등 눈앞에 닥친 현안과 노후자금 마련의 목적이 충돌하고 있다”며 “자신의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한계를 느끼는 시기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