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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판사는 서울대 법학과 4학년 때 사법고시(23회)에 이어 행정고시까지 합격한 수재였다. 박 판사는 “7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정말 지독한 책벌레였다”며 “책이란 책은 가리지 않고 읽었다. 역사를 좋아해 역사학 교수를 꿈꿨지만 ‘집안에 판사 한 명은 나와야 한다’는 부모님 뜻에 따라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됐다”고 말했다.
애초 자신이 원한 진로는 아니었지만 그의 38년 판사 생활은 결코 모자람이 없었다. 서울지방법원(현 중앙지방법원) 판사로 임용 후 법원행정처 송무심의관, 전주지방법원장 등 엘리트 코스를 밟은 정통 법관으로 서울고법 부장판사 역임 후 현직 법관 최초로 우리나라 사법부 싱크탱크인 사법정책연구원 원장으로 부임했다.
법관으로서 법전과 판결문에 파묻혀 지내던 그는 40대 중반 무렵 전환점을 맞이했다. 사법연수원 교수를 마친 후 어느 날 서점에서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란 책을 만나면서다.
박 원장은 “20년 만에 문학적 감수성을 되찾고 골프를 끊고 주말마다 국립도서관을 찾아 하루 종일 책을 봤는데 당시 읽은 책만 1000권이 넘는다”며 “초임 판사 때는 법과 법리, 증거에 충실하게 판단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어 “분쟁을 재판하는 판관으로서 조금 더 올바른 결론, 그리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결론을 내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감수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고 강조했다.
실제 인문학은 그가 인간을 이해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길을 열어줬다. 박 원장은 지난 2013년 한국 사법사상 최초로 ‘심리적 부검(사망 원인을 심리학·과학적으로 규명하는 일)’을 도입했다. 지난 2009년 과도한 업무로 극단적 선택을 한 공무원 사건을 맡으면서다.
박 원장은 “대한민국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인데 유족 입장에서 고인의 극단적인 선택의 이유를 밝힐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은 데다가 통상 가족들의 말은 대부분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인의 심정을 이해하고자 정신과 전문의 등을 통해 심층 면접하는 방법을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오랜 시간 연마한 인문학적 성찰을 담은 결과물도 냈다. 인류가 되돌아볼 만한 역사적 재판을 재해석한 ‘재판으로 본 세계사(2018)’, 시민의 인권과 사회 질서의 균형을 맞추는 판사로서 느낀 점을 서술한 ‘법정에서 못다 한 이야기(2021)’ 등 그가 쓴 책에서는 인간과 세상을 대하는 따뜻한 마음과 섬세한 눈을 엿볼 수 있다.
박 원장은 “책을 집필하면서 역사학도를 꿈꾸던 어린 시절 꿈의 절반은 이룬 셈”이라며 “올바른 판결을 위해 정말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성찰하는 사람’ 또는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W페스타에서 ‘나다움을 방해하는 마음과 사회’를 주제로 참가자들과 새로운 소통에 나선다. 그동안 일반 시민, 학생을 대상으로 법과 재판 등 법률 강연을 많이 해왔지만 ‘법’이 아닌 주제로 시민들과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 원장은 “고교 시절 읽은 찰스 램의 책에 ‘나는 인생을 살기보다 꿈을 꾸길 원한다’는 구절이 있다”며 “나다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난 후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