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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情)이 녹아든 길…지리산 둘레길에서 물벼락을 맞다 [여행]

김명상 기자I 2024.09.20 06:00:00

지리산 둘레길 3코스의 매력에 빠지다
남원 인월~마천 금계마을에 열린 3코스
약 20.5㎞ 코스에는 지리산의 매력 가득
민박집 많은 매동마을에 넘친 사람의 정
남원 실상사 경내 걸으며 사색의 시간을
등구재 가는 길에 숨은 맛집서 기운충전

지리산 둘레길 3코스 중 등구재로 오르는 길에 펼쳐진 계단식 다랑논
[남원(전북)=글·사진 이데일리 김명상 기자] 가끔은 지칠 때까지 그저 걷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종종 찾던 곳이 지리산 둘레길이다. 몇 년 만에 다시 간 지리산 둘레길의 풍경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시골 마을의 정,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의 흥겨움, 녹색 자연의 쾌청함은 예전 그대로였다.

◇지리산에서 처음 열린 특별한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코스 안내판
지리산 둘레길은 말 그대로 산 주변을 빙 둘러서 이어지는 도보길이다. 총 길이 295㎞의 지리산 둘레길 22개 구간 중 가장 처음 열린 구간은 전북 남원시 인월면과 경남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에 걸쳐 있는 3코스. 총 길이 20.5㎞인 이 구간은 시작점인 인월 지리산 공용터미널에서 조금만 걸어도 각박한 도시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지리산 둘레길 3코스에 있는 중군마을의 벽화
용의 몸통 같은 지리산의 능선을 바라보는 길은 중군마을로 이어진다. 눈에 띄는 것은 담장마다 그려진 벽화다. 일월오봉도부터 고운 한복을 입고 말을 탄 여인, 소나무와 곰 등 한국적인 풍경으로 가득한 그림이 정겹기만 하다.

중군마을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산길이 시작된다. 삭막한 도시 생활 중 꿈에 그리던 고즈넉한 풍경이다. 지나다 마주친 마을 어르신은 둘레길을 걷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는 말에 “더워서 그래. 가을이 늦어져서 요즘은 사람이 뜸해”라는 답을 들려주신다.

걷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지만 신체적이나 정신적으로 매우 유익한 운동으로 꼽힌다. 여기에 한적하면서도 잡념을 떨쳐 버리고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길이 계속 이어지니 더할 나위가 없다.

중간 쉼터에 해당하는 수성대에 이르자 시원한 계곡물이 반겨준다. 예전에 왔을 때는 천막 아래 평상에 커다란 막걸리 통이 놓여 있었다. 따라 마신 뒤 자율적으로 비용을 놓고 가는 양심 주막이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 아쉬웠다.

목재 다리가 설치된 수성대 계곡
◇살가운 정(情)이 피어나는 매동마을

배너미재를 넘어서면 시야가 탁 트이면서 장항마을로 길이 연결된다. 수령 400년이 넘은 당산나무가 방문객을 반겨주듯 가지를 넓게 펼친 모습이 실로 위풍당당하다. 장항마을을 지나 좀 더 걸어가니 숙박을 할 수 있는 매동마을이 나왔다. 시골 마을의 정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푸근함이 가득한 곳이다.

지리산 둘레길 3코스에서 1박을 할 수 있는 매동마을의 벽화
마을을 돌아보다 오래전 하룻밤을 머물렀던 한 민박집 앞을 기웃거렸다. 마당에서 마늘을 다듬던 주인 할머니의 “어떻게 왔냐”는 물음에 몇 년 전 머물렀던 여행객이라고 답하자 반색하며 어서 들어오라 손짓한다. 단 하룻밤 머문 이름 모를 손님을 단골처럼 반갑게 맞아주는 할머니 모습에 죄송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올해로 연세가 아흔둘인 할머니는 요즘 날이 더운 탓인지 좀 한가하다고 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참 많이 왔어. 사람들이 잘 데가 없어서 내가 방을 비워주고 부엌에서 자기도 했었는데 말이야.”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의 매동마을 전경
할머니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손자를 대하듯 한참 동안 동네 주민 이야기, 가족 이야기 등 개인사를 풀어놓았다. 길을 나서려고 작별 인사를 하자 할머니는 막 떠나려는 버스를 잡듯 식혜며 두유, 비타민 음료 등을 잔뜩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나오셨다. 괜찮다고 마다하자 “다음에 꼭 오소. 꼭 다시 들르소”라며 억지로 쥐여주신다.

어느 누가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을 이렇게 대해줄까. 그 어떤 5성급 호텔을 간다고 해도 이런 진심 어린 환대를 받기란 어려울 것이다. 무거워진 두 손에 할머니의 깊은 정과 푸근한 마음이 전해져 가슴이 뭉클해졌다.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치유되는 곳

실상사의 보광전과 삼층석탑
매동마을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가면 남원 실상사에 닿는다.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창건된 실상사는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을 비롯해 10여 점이 넘는 보물급 문화재를 간직한 천 년 사찰로도 유명하다. 산속 깊은 곳에 있는 다른 절과 달리 평지에 있어 누구나 쉽게 방문할 수 있다. 고색창연한 경내를 한 바퀴 돌다 보니 어느덧 마음마저 평온해진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실상사는 넉넉한 정을 품은 지리산과 꼭 닮았다.

등구재로 오르는 길에 펼쳐진 계단식 다랑논
다시 목적지인 금계 방향으로 발길을 뒀다. 울창한 숲길을 지나 중황마을과 상황마을을 지나는 길은 평이한 편이지만 등구재(650m)로 가는 길이 곧 나타난다. 둘레길이라고 얕잡아 본 이들에게 매운맛을 보여주는 등구재는 경남(함양)과 전북(남원)의 경계로 3코스에서 가장 힘든 고비이기도 하다. 오르는 길옆으로 계단식 다랑논이 펼쳐지는데 푸른 정원이 차곡차곡 쌓인 듯한 절경에 힘든 와중에도 탄성이 나온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등구령쉼터 내부
가파른 길을 오르다 지쳤을 무렵 등구령 쉼터가 보였다. 비빔밥, 파전, 막걸리 등을 내놓는 숨은 맛집이자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휴게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리로 와서 엎드려 봐. 등목 좀 해.”

땀에 절은 모습을 본 주인 아주머니가 옷도 벗지 않은 몸에 냅다 물을 끼얹는다. 워낙 더운 날씨에 젖은 몸이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 말라버렸다. 내친김에 막걸리에 비빔밥을 시켰다. 갖은 산나물에 구수한 된장찌개, 맛깔난 김치를 곁들이니 호사스러운 식사가 따로 없다.

등구령쉼터에서 판매하는 산채비빔밥
기운을 얻어 등구재를 넘은 뒤 이어지는 길에 지나는 창원마을은 수확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여기서부터 목적지인 금계마을까지 힘든 길은 별로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카페와 식당, 펜션이 운영 중인 금계마을에 이르면 20㎞의 긴 산행이 마무리된다.

다시 터미널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나이 지긋한 기사님이 “이렇게 더운데 계곡이나 가지 왜 생고생이냐”며 타박 섞인 한 마디를 던졌다. 거칠지만 걱정 어린 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쯤 되면 지리산 둘레길은 ‘사람의 정이 담뿍 녹아든 길’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도로와 하늘이 맞닿은 풍경이 펼쳐지는 ‘하늘길’
3코스는 둘레길이지만 가파른 경사가 종종 나타나고 해발 500m가 넘는 산을 몇 번 넘어야 해서 체감 난이도가 낮다고 할 수 없다. 초보자라면 당일 완주의 욕심을 내기보다 1박 2일 일정으로 계획을 세우는 게 좋다. 코스 중간에 쉴 만한 매동마을에 시골 특유의 민박집이 6~7곳 정도 있으니 참고하자. 예약은 포털 사이트에서 ‘매동마을 민박’으로 검색해 나오는 전화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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