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성들의 전유물인 판소리도 진채선 명창의 등장 이후 여류 명창들이 많이 탄생했잖아요. 박남옥도 진채선처럼 여자들이 꿈꾸는 게 쉽지 않던 시대에 영화라는 목표를 열정으로 이룬 인물이라고 생각해요.”(김주리)
국립창극단 단원 이소연과 소리꾼 김주리는 지난 15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국립극장 기획공연 ‘명색이 아프레걸’에서 맡은 주인공 박남옥을 소개하며 “대단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작품 속에서 맡은 인물의 실제 모델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박남옥(1923~2017)은 한국 영화 최초의 여성 감독이다. 1954년 생후 6개월이 된 딸을 맡길 곳 없어 업고 다니며 찍은 ‘미망인’을 발표해 한국 영화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명색이 아프레걸’은 바로 이 박남옥의 ‘미망인’ 촬영 과정을 극작가 고연옥, 연출가 김광보가 무대화한 작품이다. 국립극장이 9년 만에 선보이는 전속단체(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악관현악단)의 공동 기획공연이다.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산불’ ‘춘향’ 등에서 주연을 맡았던 이소연, 그리고 세계 최연소·최장시간 판소리 연창공연 기록을 지닌 김주리가 박남옥 역에 더블 캐스팅됐다. 이들은 지난해 ‘변강쇠 점 찍고 옹녀’에서 옹녀 역을 함께 맡았던 각별한 선후배 사이. 두 사람은 “이번에도 함께 같은 역을 맡아 서로 많이 배우고 있다”며 웃었다.
|
기존 창극에서 흔치 않은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다. 덕분에 두 사람 모두 연기의 맛을 제대로 느끼고 있다. 이소연은 “여성스러움을 부각하지 않고 영화를 향한 열정을 가지고 살았던 한 사람을 편안하게 보여주려고 한다”며 “공동기획 공연이라 컨템포러리한 부분도 있어서 소리꾼이자 배우로서 느낀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연은 노래와 연기가 한데 어우러지는 음악극으로 꾸며진다. 오페라계 차세대 작곡가로 주목 받고 있는 나실인이 참여해 판소리보다 현대적인 선율의 음악을 준비 중이다. 판소리에 흔치 않은 대구 사투리를 써야 하는 것도 이번 공연에서 마주한 새로운 도전이다. 이소연, 김주리는 “대본 첫 장부터 대구 사투리를 쓴다고 적혀 있어 당황했다”며 “열심히 사투리 연습을 하고 있다”고 웃었다.
이번 공연은 오는 23일부터 내년 1월 24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개막은 잠정 연기됐다. 이소연, 김주리는 “여성 영화감독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깊이 보면 한 사람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밝고 유쾌한 작품”이라며 “‘성공한 영웅보다 실패한 사람이 더 의미 있다’는 작가, 연출님의 말처럼 관객도 자신의 꿈을 돌아보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