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덕 콘텐츠전략실장] 1997년11월21일 밤 10시20분. 사흘 전 취임한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정부는 금융 외환 시장의 어려움을 극복하기위해 국제통화기금(IMF)에 유동성 조절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청전벽력 같은 일이 잇따랐다. IMF의 요구에 따른 긴축과 고강도 구조조정을 견뎌야 했다. 대우 동아 쌍방울 해태 등 30대 재벌 기업 중 16개가 퇴출됐다. 은행 25곳 가운데 16곳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저성장과 실업이 고착화됐다. 기업은 이른바 파괴적 혁신은 뒤로한 채 현상 유지를 위한 돈벌이에 급급했고, 젊은이들은 안정적인 공공일자리에 매달렸다. 상시구조조정 탓이다. 위험헷지에 익숙해졌다.
IMF관리 체제는 대기업 은행 등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안정적인 회사를 다니던 직장인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고도성장으로 축적되고 있던 중산층 붕괴의 신호탄이었다. 외환위기를 만들었던 선단식 경영, 부채 경영의 끝이 보였지만, 이를 대체할 경제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채 중산층 붕괴라는 멍에를 안고 살게 됐다.
사람들은 20년 전 외환위기 시절을 되새기면서 금 모으기 운동과 박세리의 ‘맨발투혼’을 떠올린다. 서슬 퍼렀던 IMF 체제를 극복하게 만든 명장면이어서다. 제2의 환란은 오지 않을 것인가. 한국 경제는 탄탄한가.
박성현이 올해 LPGA 무대에서 수퍼루키로서 3관왕(상금왕 신인왕 올해의 선수상)에 올랐다는 반가운 소식에 박세리가 떠올랐다. 박세리와 박성현은 닮은꼴이다. 탄탄한 기본기에 멘탈갑(甲)을 빼닮았다. 박성현은 박세리의 기적을 보고 골프채를 잡은 ‘박세리 키즈’의 결실이다. 외신은 한국 선수들이 그린을 지배(Korean Dominance)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박세리는 한국 여자 골프가 글로벌로 나가는 시발탄을 쏘았다. 한국 골프는 그 이후 유망주 발굴과 체계적인 훈련 시스템, 치열한 내부 경쟁으로 담금질을 거듭해 글로벌 골프생태계를 완성했다. 승리경험 못지않은 패배경험도 많다. 지구를 거꾸로 도는 강행군에도 컨디션을 조절하는 노하우를 터득했다. 두려울 게 없는 까닭이다. KLPGA에서 통하면 LPGA에서도 통한다.
한국 여자 골프는 20년 전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반면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를 벗어난 이후 기억에 남는 명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국민인식도 다르지 않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최근 외환위기 발생 20주년을 계기로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외환위기가 현재 한국에 끼친 영향(복수 선택)을 묻자 응답자의 88.8%는 비정규직 문제 증가를 꼽았다. 또 공무원·교사 등 안정적인 직업 선호 경향을 낳았고(86.0%) 국민 간 소득 격차를 키웠고(85.6%) 취업난을 심화했다(82.9%)는 반응도 이어졌다. 외환위기 발생 20년이 지난 현재 한국에 가장 중요한 과제로는 경제면에서는 일자리 창출 및 고용 안정성 강화(31.1%), 새로운 성장 동력(4차산업 등) 발굴 등 경쟁력 제고(19.2%)라는 답변이 나왔다.
미쉘 캉드쉬 당시 IMF 총재가 우리나라의 IMF체제를 ‘위장된 축복(disguised blessing)‘이라고 평가했는데, 국민의식은 이를 비웃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 39억 달러 규모였던 외환보유고는 지난 달 3845억 달러로 세계 9위다. 그렇지만 기존 산업의 성장판은 닫혀가고 있고 패러다임을 바꿀 산업군이 보이지 않고 있다. 노동생산성 저하, 혁신 가로막는 규제, 소득불평등이 고질병이 돼 활력을 잃고 있는 탓이다. 외환위기가 ‘위장된 축복’이 아니라 고질병을 갖게된 단초는 아니었는지 곰곰 새겨볼 일이다. ‘내로남불’의 민심은 자신의 영역은 빼고 혁신하라고 한다. ‘나를 밟고 가라’는 식이다. 그러나 지금 노동개혁 등 구조개혁을 하지 않으면 20년 후 한국 경제 고질병 리스트에 ‘치매’까지 넣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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