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경기도 평택 팽성면 객사리에서 태어난 강태영 여사는 남편인 김 전 회장을 떠나보낸 지 35년 만에 그의 곁에 몸을 누이게 됐다. 농촌의 평범한 한 가정에서 태어난 강 여사는 수원여학교 졸업을 앞두고 집안 사이에서 김 전 회장과 맞선 자리가 주선되면서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됐다.
김 전 회장은 맞선 결혼에 반발해 강 여사를 만나기 전날 먼저 찾았으나 둘은 서로에 대한 호감을 느끼고 결혼을 결심했다. 김 전 회장의 형인 김종철 전 국민당 총재보다 앞서 결혼해 당시에는 이례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강 여사는 묵묵하게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교육에 힘쓰는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꼽혔다. 평소에는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강단있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남편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세심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남편인 김 전 회장이 1981년 7월 59세에 생을 달리한 이후 자신의 생일을 제대로 챙기지 않으며 남편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남편을 추모하기 위한 사업에도 몰두해 성 디도(김 전 회장의 천주교 세례명) 성전을 지어 봉헌했고 자신이 직접 지은 시로 남편을 기렸다. 1985년 7월 여천 공장 복합수지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후 지은 ‘여수에서’는 아들의 사업 성공 가운데 느낀 남편의 빈자리를 그대로 표현했다.
아울러 자녀 교육에도 관심이 높아 두 아들을 명문대학과 성공한 기업인으로 키우기도 했다. 장남 김승연 회장은 경기고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드폴대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차남 김호연 전 빙그레 회장(현 김구재단·아단문고 이사장)은 경기고와 서강대, 일본 히도쓰바시 대학원을 나왔다.
강 여사는 1990년대초 벌어진 한화그룹의 형제간 재산분쟁에서 화해를 유도해 갈등을 봉합한 인물이기도 하다.
재산분쟁은 김 전 회장이 유언 없이 타계하면서 불거졌다. 차남인 김호연 이사장이 주요 계열사 경영에서 밀려나면서 장남인 김승연 회장을 상대로 재산권분할 소송을 제기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강 여사는 1995년 자신의 칠순잔치에서 두 아들간의 화해를 이끌어냈다. 소송이 진행된지 3년반 만의 일이었다. 두 형제는 화해하기 전까지 31차례 법정에 서기까지 했다.
아울러 강 여사는 문화, 교육사업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문인들과 함께 문학동인을 만들어 문단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또한 문학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한국 고전과 근현대 문학을 수집, 2005년 재단법인 아단문고를 설립하기도 했다.
1976년 남편의 고향인 천안에 고등학교를 세울 때도 고인의 조언이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공장 부지로 확보해둔 신부동 땅을 학교부지로 추천한 이가 강 여사였다. 이를 통해 천안북일고가 개교했다. 이 밖에도 천안에 수재가 발생할 때 이름을 밝히지 않고 거액의 복구비를 지원하거나 쌀지원, 장학사업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진행했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승연(한화그룹 회장), 호연(빙그레 회장), 영혜(전 제일화재해상보험 이사회의장) 등 2남1녀를 두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고 발인은 13일 오전 7시, 장지는 충남 공주시 정안면 선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