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귀도(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새 영화의 제목을 '이탈리아'라고만 정해놓고 각본을 한 줄도 쓰지 못한 상태다. 제작자는 서둘러 기자회견을 열지만, 귀도는 대충 얼버무리고 휴양지로 달아나버린다. 그는 그곳으로 정부(情婦) 칼라(페넬로페 크루즈)와 아내 루이사(마리옹 코티야르)를 동시에 불렀다가 두 사람 모두에게 들통나 곤욕을 치른다. 자신이 우상처럼 떠받드는 배우 클라우디아(니콜 키드먼)에게서도 영감을 얻지 못한 귀도는 결국 창작 능력이 완전히 고갈됐음을 자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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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코 펠리니의 대표작 '8½'은 뮤지컬 '나인'에 영감을 줬으며, 다시 이 뮤지컬 영화의 기반이 됐다. 영화 속에서는 제목이 '나인'인 것에 대해 귀도의 9번째 작품의 가제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8½에 ½을 더한 숫자라는 뜻에서 어떤 식으로든 상상이 가능하다.
첫 장면에서 영화의 운명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감독에게 "가장 좋아하는 파스타는 어떤 것인가"를 묻는 기자를 보여주며 영화기자와 평론가에 대한 경멸을 서비스하는 이 영화는, 사실 '좋아하는 파스타' 같은 질문에나 대답할 수 있을 만큼 바닥까지 떨어진 예술가의 고통을 그린다. 예술가는 그 고통을 이기려 하지 않고 주변 여인들에게 젖먹이처럼 징징대며 매달려 고통을 잊으려 한다. "젊고도 지혜롭고 싶고, 프루스트와 사드, 예수, 부처, 모하메드의 모든 것을 갖고 싶다"는 영화 속 감독의 대사는, 우지끈 뚝딱 소리를 내며 화려하게 개봉하는 영화의 이면에 셀 수 없는 고독과 불면의 밤이 있음을 토로한다.
'시카고'처럼 다이내믹한 장면과 드라마가 잘 녹아들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거의 모든 장면의 카메라 구도와 조명은 예술적으로 아름답다. 특히 마지막 장면의 고요한 파격은 오랫동안 잊기 어려운 잔영을 남길 것이다.
모든 배우들의 노래 장면 가운데, 케이트 허드슨이 '시네마 이탈리아노(Cinema Italiano)'를 부르는 장면이 가장 역동적이며 인상 깊다. 그저 그런 로맨틱 코미디에서 슬랩스틱을 보여줬던 그녀는 명작 '올모스트 페이머스'에서의 매력을 되찾았다. 잡지기자이면서 귀도의 열혈 팬인 그녀가 귀도를 유혹하는 시퀀스는, 노출이 적어도 얼마든지 섹시한 연출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일찌감치 인터넷에 공개된 미국 그룹 '블랙 아이드 피스'의 보컬 퍼기(사라기나 역)의 노래 '비 이탤리언(Be Italian)' 장면도 뛰어나다. 마리옹 코티야르는 이 영화의 쟁쟁한 여배우들 가운데 가장 돋보인다. 그녀의 출연 장면이 조금 더 많았더라면, 다른 여배우들의 질투가 폭발해 영화촬영이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페넬로페 크루즈가 란제리 같은 옷을 입고 노래하는 모습은 섹시하기는커녕 천하게 보이고, 니콜 키드먼의 연기는 이 영화가 그녀의 데뷔작인 양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왜 어떤 중년 남자는 젊은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지 알게 해주는 배우다. 오랜만에 스크린에 나온 소피아 로렌의 외모와 열정은, 그녀의 나이(75)를 감안하면 존경스럽다.
▶전문가 별점
―페데리코 펠리니의 '8½'을 화려함으로 넘어서려 했지만 에잇(8)이 돼버린 영화. ★★★ 이상용·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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