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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읽는증시]사외이사, 그들은 아군인가 적군인가

전재욱 기자I 2019.03.23 09:30:00

문민정부 때 도입해, 국민의 정부 시절 상장사로 확대
그때나 지금이나 `교수` 선호..중소 상장사 섭외 애로
등기이사 수 대폭 감소 긍정..`거수기 노릇` 여전한 숙제

조순(왼쪽 두번째) 서울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SK㈜ 사외이사들이 2004년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본사에서 국내 상장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자체 제정한 윤리강령을 선포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사외이사는 기업에 ‘도움’을 주려는 이다. 의사결정은 안에서 혼자서 하는 것보다, 밖에서 같이 하는 게 오류를 줄이는 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사결정 과정이 익숙지 않은 쪽은 거북하다. 도움을 ‘견제’로 인식하는 탓이다. 이렇듯 사외이사는 도움과 견제 중간 즈음해서 탄생했다. `견제해서라도 도움을 주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어갔을 테다. 사실 경제가 살려면 기업이 커야 하고, 기업이 크려면 의사결정이 옳아야 하고, 그러려면 기업 지배구조를 고쳐야 했다.

◇김영삼 만들고, 김대중 넓히고

이런 밑그림에 처음 색을 칠한 것은 문민정부다. 김영삼 청와대는 1994년 ‘세계화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켜 기업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궁리에 들어간다. 궁리는 세련 과정을 거쳐 ‘사외이사’ 혹은 ‘외부이사’ 개념으로 발전했다. 외국 사례를 참고했다. 미국은 1973년 회사가 증시에 상장하려면 사외이사 3명을 두도록 했다. 당시 일본과 독일에서도 외부인을 내부로 데려와 회사를 감사하는 장치가 있었다.

개념은 1995년 6월29일 발표한 ‘증권산업개편방안’에 담겨 제도로 승화한다. 방안은 기업은 사외이사를 ‘총 이사 수의 40~50% 수준으로 구성’하라고 했다. 재계 반발이 일었다.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부설 한국경제연구원은 ‘사외이사 제도는 한국 풍토나 기업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 바람직하지 않은 기업지배구조 개혁안’이라고 했다.

여하튼 민간에서 현대그룹이 1996년 1월 그룹계열사 금강기획과 현대정보통신에 사외이사를 도입하기로 첫 테이프를 끊었다. 포항제철(포스코 전신)은 1997년 1월 공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사외이사 도입을 선언했다.

우려와 달리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SK텔레콤은 1998년 7월 이사회에서 당시 남산 사옥을 현재의 서린동 사옥으로 이전하는 안건을 통과시키려다 실패했다. 회사 사외이사 남상구 고려대 교수와 김대식 한양대 교수가 “신사옥이 현 사옥보다 비싸고, 부동산 경기가 안 좋아서 현 사옥을 팔기도 어렵다”고 반대한 결과였다. 그해 현대자동차가 정리해고를 단행하는 과정에서 노사분규를 겪자 사외이사가 나서 “해고 규모를 합리화하라”고 중재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사외이사가 너무 엄격해서 모진 시어머니를 모시는 듯하다”고 평가(동아일보 1998년 10월2일 치)하기도 했다. 기업 입장에서 `견제`가 시작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만만한 게 교수

사외이사 제도가 상장회사 전체로 적용된 것은 1999년부터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꾸린 비상경제대책위원회는 1998년 2월 이런 내용을 담은 증권관리위원회 규정 개정안을 발표했다. 당시 비대위 실무기획단장으로 있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사외이사를 도입하지 않는 기업은 상장 못 하게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던 혹독한 시기에 내놓은 극약 처방이었다. 재계는 군말하기가 궁색한 처지였다. IMF 사태는 기업 방만 경영에서 비롯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외이사 몸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업계가 추정하기로 당장 필요한 사외이사 수는 1000명 안팎이었다. ‘경영·경제·법률 또는 관련 기술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명망가’를 한번에 이 정도 규모로 확보하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만만한 게 교수였다. 1999년 8월 금융감독위원회(금융감독원 전신)가 조사 결과를 보면, 636개 상장회사의 사외이사 가운데 대학교수가 19.6%를 차지해 비중이 가장 컸다. 변호사(11.5%), 언론인(4.4%), 전직 공무원(2.8%) 순이었다.

그나마 여력이 되는 대기업은 나은 편이었지만, 중소·중견기업은 사외이사 확보에 애를 먹었다. 되는 대로 데려오다 보니 이력이 적합하지 않거나, 회사와 친분이 있던 이들이 사외이사로 갔다. 증권감독위원회가 실태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사외이사 있었다면 삼풍백화점 붕괴했을까

사외이사 덕에 등기이사가 줄어드는 효과도 나타났다. 상장사는 등기이사 총수의 4분의 1 이상을 사외이사로 둬야 한다. 자산 2조원 이상 대기업은 과반을 유지해야 한다. 예컨대 등기이사가 40명이라면 사외이사는 10명(대기업 20명) 이상이어야 한다. 비용이나 관리 측면에서 기업이 사외이사를 이렇게 두는 것은 어렵다.

사외이사(분자)를 줄이려면 등기이사(분모)를 줄여야 했다. 이에 따라 1998년 현대자동차는 등기이사를 70명에서 10명으로, 삼성전자는 59명에서 24명으로 각각 축소(매일경제 1999년 2월19일 치)했다. 다만, 사외이사는 회사의 거수기 노릇을 한다는 지적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사외이사 제도 도입을 처음 발표한 1995년 6월29일, 삼풍백화점이 붕괴했다. 참사는 삼풍백화점 경영진 탐욕이 원인이었다. 불법 인허가를 받으려고 뇌물을 건넸고, 건축물을 불법으로 증축했다. 날림 공사 탓에 설계·시공·유지관리가 모두 부실했다. 사외이사 제도가 진작 정착해 삼풍백화점 경영진에 따끔한 충고를 했다면 그날 참사가 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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