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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신중섭 기자] “힘드실 텐데…괜찮으시겠어요?”
지난 18일 오후 1시 40분쯤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 앞에서 만난 택배기사 안모(37)씨는 첫 만남에 이렇게 말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 않더냐’ 괜찮다고 답은 했지만 택배 차량에 수북이 쌓인 상자들을 보는 순간 걱정이 앞섰다. 택배 차량을 한참 바라보자 안씨는 “오늘 물량은 그렇게 많지 않아 다행이다. 많을 때는 400개도 넘어간다”며 어깨를 두드렸다.
◇ 30개짜리 생수통 배달하면 1300원
이날 안씨가 배달할 물량 약 300개 가운데 택배 물량 100개 배달을 돕기로 했다. 동선을 고려해 물건을 내리는 작업이 먼저 이뤄졌다. 배송 과정에서 반송하는 물건까지 챙겨야 하는 일도 머리 속에 그려야 했다. ‘물건을 주소에 따라 배달하면 되겠지’란 생각은 오산이었다.
배송 후 전산작업과 고객 주소나 요청사항 확인을 위한 배달표(송장) 정리도 해야 한다. 최근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등을 통해 작업이 수월해졌지만 여전히 종이 송장을 고수하는 기사들도 적지 않아 직접 해보니 분류 작업에만 20분 이상 걸렸다.
본격적인 배송을 위해 손수레에 물건을 실으려다 여러번 휘청였다. 송장을 보니 30개짜리 생수였다. 옆에서 손수레에 택배를 싣던 안씨가 “김장철에 배달이 몰리는 절임 배추는 한 박스당 20㎏ 정도로 한 집에서만 4~5박스를 시킬 때도 있다”고 말했다.
배송 한 건 당 받는 돈은 평균 700원 정도다. 가벼운 것은 500원에서부터 20㎏을 웃도는 택배는 추가 운임이 붙어 1300원까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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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배달을 위한 손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단지에서 주차가 가능한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출발했지만 배달 장소까지 150m 넘는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덜그럭 거리는 손수레 소리가 단지 안에 울려 퍼졌다.
첫 배송은 아파트 29층이었다. 긴장한 마음에 초인종을 눌렀지만 고객은 부재중이었다. 첫 배송을 마치고 고개를 돌리니 엘리베이터는 이미 1층에 내려간 후였다.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두고 배송할 경우 폐쇄회로(CC)TV를 본 아파트 측 제지를 받는다.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실수도 이어졌다. 같은 동에 배달해야 하는 물건을 한 번에 싣지 않아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가 물건을 가지고 오거나 물건을 꺼내느라 수레에 쌓은 물건을 다시 내려놓기도 했다. 당황한 마음에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마지막 택배 상자를 배달하니 오후 7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아파트 고층 창문 너머 끝이 보이지 않는 고층 아파트들이 눈에 들어왔다. “300개를 배달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니 머리속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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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교통부는 이달 17일 택배 차량의 출입을 막고 손수레 배송을 요구하며 갈등이 불거진 경기도 다산 신도시에 대한 택배 분쟁 조정안을 제시했다. 입주민과 택배업계는 실버 택배를 도입해 택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뜻을 모았다. 단지에 보관소를 만들고 물건을 놓으면 단지 내 센터에서 고용한 노인들이 집까지 배달해 주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실버 택배 비용 50%를 정부·지자체가 부담하기로 하면서 또 다른 갈등을 낳았다. 차 없는 아파트 입주민들의 택배 비용을 국민 세금으로 보전해주는 셈이라며 반발이 거셌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다산 신도시 실버 택배 비용을 입주민들의 관리비로 충당해야 한다는 청원에 25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공감을 나타냈다.
악화한 여론에 놀란 국토부는 실버 택배 비용을 입주민이 부담하도록 재차 중재에 나섰지만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국토부는 “국민의 여론을 수용해 아파트 단지 내 택배차량 통행을 거부하는 경우 자체적으로 해결방안을 찾는 것으로 정리했다”며 실버 택배 지원을 철회했다.
택배기사 정모(33)씨는 “택배 배송이 늦어질 경우 그에 대한 불평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실버 택배 등의 대안이 택배 대란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가구 수에 맞는 무인 택배함 공급이나 택배 차량의 지상 이동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