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농담이지?’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할지 황당한 순간이었다. 식당 안 시계의 ‘똑딱똑딱’ 초침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자 민망해진 그는 말했다. 그의 전 직장 얘기였다.
본인은 영국 타블로이드 일요신문 ‘뉴스오브더월드’ 출신 기자였다고 소개했다. 뉴스오브더월드가 어떤 신문인가,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신문이었다. 나름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한 시도였지만, 농담치고는 괴이했다. 도청 당하지 않고 있으니 안심하라니...
그도 그럴 것이 뉴스오브더월드는 도청 스캔들로 폐간됐다. 1843년 창간해 2011년 폐간할 때 당시 발행 부수는 250만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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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색저널이지만 맨체스터유나이티드보다도 유서 깊은 매체의 폐간은 세계적으로도 이슈였다. 더군다나 매체들의 천국인 영국 런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 일로 그는 실직을 했다. 그러다 새 일을 찾던 중 주한 영국 대사관에 잡(job)을 얻게 됐다. 우리로 치면 황색저널에서 일하던 기자가 외교부 공무원으로 재입사하게 된 것이다. 되레 한국인의 시각에서는 이게 신기했다. ‘실직 기자가 해외 공관의 직원으로 채용되다니…’
런던 핀테크 산업 얘기를 하면서 뜬금없이 폐간 매체 기자의 재취업을 얘기한 이유는, 영국 공직사회가 갖는 특성을 얘기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 나라도 공무원을 채용하지만 우리처럼 ‘기수 문화’라는 게 없다. 아니 있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처럼 대규모 시험을 대단위로 치고, 일정 기준을 통과한 사람에게 ‘공무원’이라는 사모관대를 입혀주진 않으니까.
그 나라 정부는 필요한 직위에 필요한 사람을 인터뷰 보고 채용하는 식이다. 정부에서 월급을 받는다는 것 외에는 일반 기업과 큰 차이가 없다. 천 년 가까이 ‘과거 문화’를 유지해온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생경할 수 있다.
당연히 영국인들에게 공무원은 평생 업(業)이 아니다. 민간 기업에 있던 사람이 정부 관료로 들어가고, 정부 관료로 일하던 사람이 기업으로 가기도 한다. 예컨대 신한은행장이 금융위원회 국장으로 가는 식이다. 책상에 앉은 공무원이 아니라 민간 영역을 겪어본 전문가가 정책과 관련된 일이다보니 더 실질적일 수 있다.
물론 학연과 지연이 얽히고 섥힌데다 관민유착에 대한 거부감이 큰 한국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정부 관료 출신들이 기업에 오는 경우는 있지만, 이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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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 공무원은 공무원끼리 민간인(?)들은 민간인끼리 어울리다보니 서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같이 일하기는 더 어렵다. 서로 만나 간담회를 한다고 하지만 ‘보여주기식’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규제를 완화한다고 하지만 ‘찔끔’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영국은 좀 다른 듯 하다. 우리나라 금감원 격인 영국금융감독청(FCA)는 민영화돼 있다. 한국의 금감원도 민간 공공기관이지만, 한국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 FCA는 구성원 상당수가 투자은행에서 일하다 건너온 사람들이다. 시작부터 공무원이 아닌 사람들이 대다수다.
런던에서 핀테크 스타트업을 하는 창업자 몇몇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FCA 직원들은 업계를 보는 마인드부터 다를 수 밖에 없다. 감독과 규제의 대상이지만, 진흥의 대상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민간 부분 사업을 키워볼까 연구를 하고 제안을 한다. 현업에 있었던 갈증을, 정부에 와서 풀어보는 것이다.
규제샌드박스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지난 2014년 FCA가 시행을 했고 우리나라가 그 용어 그대로 가져왔다. 혁신 서비스를 하는 스타트업이나 기업에 대해 ‘한시적 규제 완화’를 해주고 마음껏 사업을 해보라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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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영국은 헌법이 없는 관습법, 불문율의 나라다. ‘몇몇 하지 말아야할 짓’만 하지 않는다면 어느 것이나 할 수 있다. 사후규제 국가이기도 하다. 법을 집행하는 감독 기관에 대한 신뢰가 한국보다는 높은 듯 하다.
대신에 어기면 무자비하다. 도청 파문으로 폐간을 했던 뉴스오브더월드가 한 사례다. 승차공유서비스로 성장한 우버도 운전자들의 근로 윤리를 어기자, 런던시내 운행을 금지하겠다고까지 했다.
이런 제도적인 측면 외 영국 핀테크 필연적으로 큰 이점이 있다.
첫번째는 영어와 입지. 세계 최강금융대국 미국이 쓰는 언어이기도 하고 전세계 통용어다. 입지도 그들 입장에서는 환상이다. 유럽 입장에서 영국은 대서양으로 나가는 관문이고, 미국 입장에서 유럽의 전초기지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라는 악재 속에서도 영국내 기업들의 대탈출이 생각보다 적은 이유다.
두번째는 영국 런던이 세계 금융의 중심지라는 점. 바클레이스, 씨티그룹, 크레딧스위스, JP모건, 메트라이프, 모건스탠리, 뱅크오브아메리카 등이 많다. 이들 대형 투자은행들은 새로운 사업 기회 모색을 위해 핀테크 스타트업들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기도 한다.
입지와 시장, 사업 파트너가 풍부하다보니 투자자들은 모일 수 밖에 없다. 2017년 10억5249만달러가 런던 핀테크 업체들에 투자됐다. 2017년까지 최근 5년간 런던 핀테크스타트업이 유치한 투자금액을 산정해보면(PitchBook 자료) 34억9000만달러에 달한다. 2위인 스톡홀롬이 6억5900만달러이고, 파리가 3억2708만달러 정도란 점을 고려하면 크다.
물론 런던이 갖고 있는 구조적 한계도 있다. 금융에 목을 멜 수 밖에 없는 산업 구조다. 신자유주의 사조 탓에 알짜배기 제조업 기업을 해외에 팔았다. 남은 건 금융과 관광 뿐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 제일먼저 타격을 입는 곳이 이곳이다.
정부와 기업 간의 유착은 양날의 검과 같다. 한국은 그 이점과 폐해를 수십년 겪었다. 정부의 지원 아래 특정 전략 산업을 신속하게 성장시킬 수 있지만, 정부 관료와 기업인이 사리사욕을 추구할 수 있다. 한국의 감독 기관과 기업 간 인적 교류가 제한될 수 밖에 없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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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한국은 세계의 중심이 되어 본 적이 없다. (고구려와 발해는 예외로 하자) 한국어는 한반도와 일부 교민들이 쓰는 제한적 언어다. ‘BTS’와 ‘기생충’ 덕분에 한국인이 아시아에서 갖는 문화적 자부심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한국이 일류국가라고 장담하기힘들다.
이런 아쉬움은 시장 입지로 연결된다. 이명박 정권 때 여의도 IFC가 건립됐고 2000년대 이후 금융 산업을 키우기 위한 노력을 했다. 여의도에 세계 최고의 사무실까지 마련해줬는데 기대했던 해외 금융사들은 대단위로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금융사는 물론 핀테크 스타트업들에 대한 규제는 만연돼 있다. ‘관치’는 금융업계에서 생활용어가 됐다.
밖으로 나가긴 쉬운가. 수백년 금융업을 해왔던 금융 선진국과 비교하면 한국 금융은 걸음마 수준이다. 지난 2015년 한국 투자금융의 세계화를 꿈꾸며 규제를 풀어줬더니, 돌아온 건 ‘사모펀드 사태’라는 악몽이다. 해외 투자 경험과 네트워크가 일천하다보니 생긴 학습비용이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실망하지는 마시길.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우리의 희망은 ‘우리 아이들’에 있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글로벌에서 활동할 아이들이다. 과거의 악습에 얽매이지 않고 전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우리 금융인이 곧 나타날 것이라고 본다.
20년전까지만 해도 한국 선수가 FIFA 올해의 골(푸스카스상)을 수상하고 FIFA 주관 세계대회에서 준우승(U20 월드컵)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