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해룡 칼럼니스트] 요즘 파전이나 부침개를 파는 식당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웰빙 음식으로 부각되면서 문전성시를 이루는 식당도 많아졌다.
어릴 때 잔치집에서 코밑을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를 잊지 못하는 중년들이 많을 것이다. 동네아낙들이 둘러앉아 수다를 떨면서 노릇노릇하게 구워내는 부침개에 침을 삼켰던 개구쟁이적 추억이 한두 번 쯤은 있다.
노란 빛이 도는 예쁜 부침개의 색깔은 치자가 낸다. 치자를 찧은 다음 물에 담궈 우려낸 뒤 밀가루에 섞어 부치면 노랗게 고운 부침개가 되는 것이다. 치자가 들어가는 것은 고운 노란색 물을 들이려는 목적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옛날에는 기름진 음식을 먹어 볼 기회가 적었다. 설날이나 추석 등 명절이나 제삿날 또는 이웃에 잔치가 벌어질 때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잔치집에 놀러가면 기름진 음식을 푸지게 먹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부침개를 부칠 때는 지방성분인 기름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부침개를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가 소화장애가 유발되거나 설사를 하게 되어 쩔쩔 매는 불상사를 야기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잔치 집에서 잘 먹고 집에 돌아왔다가 몸이 축나는 일이 종종 생기기도 한다.
치자는 담즙 분비를 촉진함으로써 부침개의 느끼한 맛을 줄이고 소화장애를 줄여주는 효능이 있다. 부침개의 노란색에는 조상들의 지혜가 들어 있는 셈이다.
치자는 간기능을 개선하는 효능이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간이 나빠졌을 때는 인진쑥과 더불어 치자는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약재였다.
뿐만 아니라 치자는 화병을 치료하는 명약이기도 하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서도 속절없이 안으로 삭여야 하는 통에 울화가 가슴속까지 사무친 아낙네들의 속을 풀어준다. 그래서 화병이 났다 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치자다. 치자는 화병으로 가슴속으로 열이 차오르는 바람에 화닥증이 나서 견딜 수 없다고 하는 부인들의 화를 꺼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화병에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약재다.
옛날 집에만 묶여 살던 부인들이 오랜만에 잔치집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부침개를 붙여가면서 수다를 떨어 쌓인 울화를 풀었던 것처럼 부침개에 들어간 치자도 똑 같은 역할을 한다. 치자의 꽃말이 ‘한없는 즐거움’이란 것도 치자의 역할을 반영하는 듯 싶다.
요새도 민간에서는 치자를 여러 용도로 사용한다. 넘어지거나 삐어서 타박상을 입었을 때 밀가루와 치자가루를 함께 개어 타박부위에 붙인 뒤 붕대로 감아두면 어혈을 빨아들이는 효능이 있다. 할머니들은 이것을 치자떡이라고 하는데 부어오른 발의 염증을 빨리 가라앉히기 때문에 많이 애용해 왔다.
치자는 흰색의 꽃이 예뻐서 관상용으로 키우는 사람도 늘고 있고 자연염료로서 물감을 물들이는데도 사용된다.
동의보감에서는 치자의 성질이 차기 때문에 열독을 없애는데 탁월한 효능이 있어서 속을 끓여 가슴이 답답해서 화닥증이 나는 것을 치료한다고 했다. 특히 입안이 자주 마르며 눈이 충혈되고 얼굴이 붉어지는 증상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된다. 아울러 오줌을 잘 나가게 할 뿐 아니라 소갈(당뇨)에도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또 신경이 예민하거나 잠을 자지 못하는 불면증이 있을 때도 치자는 빼놓지 않고 들어간다. 특히 갱년기 증상이나 젊어서 부터 남편없이 자식을 혼자 키워낸 한이 많은 여성에게 치자는 좋은 벗이 된다. 여성뿐 아니라 시험을 앞두고 강박증에 시달리는 수험생들에게도 치자가 들어간 처방은 좋은 효과를 낸다. (예지당한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