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기 의심되면 바로 ‘지급정지’ 요구하세요”
사실 방송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경찰이 지급정지를 신청하자 은행이 영장을 가져와야지 할 수 있다고 응대하는 것입니다.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뭐가 오류냐”고 하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방송을 보시는 여러분들이 잘못된 지식으로 피해구제를 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를 놓치지 않을까 싶어 말씀드립니다.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이하 통신사기피해환급법) 제3조와 제4조는 “경찰 등 수사기관과 금융감독원이 사기이용계좌로 의심된다는 정보제공이 있는 경우 금융회사는 즉시 사기이용계좌의 전부에 대해 지급정지 조치를 해야 한다(피해자는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고 계시는 여러분들도 만약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했다는 의심을 들면 바로 경찰청(112)나 금융감독원(1332), 또는 해당 금융기관 콜센터로 연락해 지급정지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
지급정지 요청이 들어왔는데도 이를 행하지 않은 금융회사는 전기통신금융사기 특별법 제18조에 따라 1000만원 상당의 과태료를 물게 되고 금감원의 제재를 받게 됩니다.
지급이 정지당한 계좌에서는 그 즉시 어떠한 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고 수사를 통해 이 돈이 사기 피해금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적절한 절차를 거쳐(이를 ‘채권소멸절차 개시 이후의 피해구제’라고 말합니다) 피해자에게 돌려줍니다.
◇본인이 ‘직접’ 사기범에게 보낸 것은 ‘중과실’…미국은 범죄유형 달라
두 번째로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금융기관이 보이스피싱에 대한 피해보상을 해준다는 발언은 사실은 반은 틀리고 반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이라고 해서 사기범에게 속아 본인이 ‘직접’ 보내준 돈을 금융기관이 책임지지는 않습니다. 설사 몰랐다고 하더라도 사기범에게 돈을 건네준 것은 소비자의 과실이며 금융기관은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서비스를 제공해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1월 대법원은 검사를 사칭한 금융사기범에게 속아 1000만원 상당의 피해를 입은 A씨에게 은행이 손해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A씨가 가짜 대검찰청 홈페이지에 공인인증서 재발급에 필수적인 주민등록번호, 농협은행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는 물론 보안카드 번호와 그 비밀번호까지 모두 입력한 것을 ‘피해자의 고의·중과실’로 해당한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이런 판단은 미국도 같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은행이 금융사기 피해금을 고객에게 배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와 미국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유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경우 우리처럼 피해자를 속여 돈을 송금하게 하는 사기보다는 고객의 신분을 도용해 대출하거나 신용카드 등을 만드는 금융범죄가 잦습니다. 또 해킹 등을 통해 타인 명의 기존 계정을 탈취해 자금이체·현금을 인출하는 사례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금융기관이 제대로 신분확인을 하지 않았거나 고객의 계좌가 해킹될 정도로 보안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했다고 보고 피해자에 배상을 해주는 것입니다.
◇전체 수시입출금 계좌 중 48.2%가 1년동안 거래없어…대포통장 ‘표적’ 우려
그럼 왜 미국은 우리나라 같은 유형의 범죄는 별로 발생하지 않는 것일까요? 많은 전문가는 그 이유를 대포통장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잔액을 유지하지 않으면 약 7달러 정도의 계좌유지수수료를 부과합니다. 계좌를 만들 때도 바로 만들어주지 않고 약 2주간 사용 가능한 임시 직불카드와 임시수표가 발행되고 7~10일 후 우편으로 정식 직불카드와 수표를 배송합니다. 영국은 계좌개설을 위해 사전에 인터뷰 예약을 해야 하고 인터뷰까지 평균 일주일을 대기합니다. 신분증 이외에 재직증명서, 재학증명서 등을 지참해야 하며 다른 은행 거래내역과 잔액도 확인합니다. 계좌개설 인터뷰가 완료된 이후 약 2주일이 후에 현금카드와 비밀번호가 우편으로 발송됩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비교적 간편한 신원확인을 통해 통장을 만들 수 있고 계좌를 유지하는데 별도 비용을 내지 않습니다. 이렇다 보니 장기간 거래가 없이 방치되는 계좌가 많습니다. 금감원에 따르면 2015년 3월말 기준으로 17개 은행이 보유한 수시입출금식 요구불예금계좌는 2억 920만개이며 이 중 46.2%인 9666만개가 1년 이상 입·출금이 없고 잔액이 10만원 이하라고 합니다. 방송 중 한 전직 사기범은 “돈 보낼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돈을 받을 계좌가 없어서 못 받는 것”이라고 하죠. 이런 장기 미거래계좌는 대포통장의 주된 표적이 됩니다.
다만 최근에는 보이스피싱 등 금융사기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하며 장기 미거래 계좌를 줄이는 작업이 시작됐고 통장 만들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신원을 확인할 때 주민등록증 외에도 재직증명서, 공과금 고지서 등을 요구하게 됐습니다. 철저한 신원확인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통장을 만들어지기 어려워지면서 이전에는 30만원 수준에서 거래되던 대포통장이 100만원 수준으로 비싸졌다고 합니다. 대포통장이 줄어들수록 범죄에 드는 비용이 늘어난 셈입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보이스피싱이 사라질 수 있을까요? 아쉽게도 장기 미사용 계좌가 상대적으로 적은 미국 역시 금융범죄의 위험에 노출된 것처럼 그때는 또 다른 금융범죄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 큽니다. 결국 기술이 발전한다는 것은 사람을 통하지 않아도 많은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고 그 헛점을 노린 대표적인 범죄가 보이스피싱과 같은 금융사기인 셈입니다.
금융당국은 최근 은행창구를 가지 않아도 첫 계좌를 만들 수 있도록 비대면 실명거래를 허용한다는 방침을 밝혔는데요, 기술의 발전에 따른 변화이지만 한편에서는 이런 조치가 대포통장을 늘어나게 할 것이라는 우려도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