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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만도(204320) 통상임금 항소심 소송에서 1심 판결을 뒤집고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이 인정되지 않았다. 신의칙은 신의 성실의 원칙으로 상대방의 이익을 배려해 형평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내용 또는 방법으로 권리를 행사하거나 의무를 이행해서는 안 된다는 민법상의 원칙이다.
신의칙 배척이 통상임금 관련 판례로 굳어지자 대법원 상고심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아시아나항공(020560), 현대중공업(009540), 현대미포조선(010620), 금호타이어(073240) 등의 사건도 노조가 승소할 가능성이 커져 재계는 경영부담으로 이어질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서울고등법원 민사1부(윤승은 부장판사)는 지난 21일 만도 기능직 직원 15명이 “짝수달 정기상여금과 설·추석·여름휴가 상여금 등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퇴직금 중간정산액을 다시 계산하고 미지급분을 달라”고 낸 항소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짝수달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고, 총 미지급 퇴직금 인정액 2억5000만원을 지급하도록 판결했다. 회사가 이들에게 퇴직금 중간정산액을 추가로 지급하더라도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결과다.
1심과 2심 재판부 판단은 신의칙 인정 여부로 정반대 판결이 나왔다. 1심은 신의칙을 인정해 회사 측 손을 들어줬으며, 2심은 신의칙을 불인정해 직원 측이 승소했다.
재판부별로 통상임금 인정에 대한 엇갈린 판단은 회사에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재정적 부담’, ‘재정 및 경영 상태 악화’ 등의 신의칙 항변을 배척한 영향이 컸다.
1심 재판부는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퇴직금 중간정산액을 추가로 지급하면 회사에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재정적 부담을 지워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가져온다”고 했다.
반면 2심 재판부는 “회사가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재정적 부담을 지더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중대한 어려움이나 기업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도의 위기를 겪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로써 만도는 통상임금 관련 소송에서 모두 패소하면 1446억원의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지난해 만도의 매출은 5조6648억원, 영업이익은 1974억원, 당기순이익은 1129억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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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생물”… 경영상의 어려움 판단 모호
이번 만도 기능직 직원이 제기한 통상임금 항소심 결과처럼 신의칙 배척이 통상임금 관련 판례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지난 2월 14일 대법원의 시영운수 사건 판결은 “근로자의 추가 법정수당 청구가 신의칙에 위반되는지는 신중하고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이 판결 이후 신의칙 적용이 한층 엄격해졌다는 분석이다. 당시 통상임금과 관련한 신의칙 적용의 판단 기준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법적 혼란을 종식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여전히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 등 모호한 판단 규준을 적용했다.
재계는 재판부별로 신의칙 적용을 달리하는 등 혼란을 가중시킬 것으로 보이는 판결에 우려하고 있다.
아시아나항공,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은 1심에서 회사 측이 패했다가 2심에서 회사 측이 승소했다. 금호타이어와 쌍용자동차(003620)는 1심과 2심에서 모두 회사 측이 승소했다. 만도 근로자들은 통상임금 소송을 여러 건으로 나눠 진행하고 있는데 일반노조와 기능직노조가 제기한 통상임금 소송에서 1심에서 신의칙이 인정됐다가 2심에서 불인정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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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005380) 노조는 기아차 노조와 달리 ‘상여금의 고정성이 결여된다’는 이유로 1·2심에서 모두 패소한 상태다. 그러나 현대차 노조는 상여금의 통상임금 포함 문제를 올해 단체교섭의 4대 핵심과제로 선정해 요구하고 있으며, 대법원에 계류 중인 최종심 판결에 대법관 출신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회사 측을 압박하고 나섰다.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 중에서 현대로템(064350)과 현대제철(004020), 현대위아(011210) 등도 현재 통상임금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현대로템은 1심에서 회사가 신의칙을 인정받았으며, 현대제철과 현대위아는 1심 모두 회사 측이 패소했다.
재계는 통상임금 소송에서 잇단 패소에 기업의 위기 신호를 눈감은 판결로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기업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로 시시각각 바뀌는 환경에서 과거 경영환경이 좋았다고 해서 미래도 장밋빛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게 공통된 목소리다.
회사가 망하기 직전 상태가 돼야 신의칙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라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재판부가 기업의 매출액·영업이익·순이익 등 단기적인 재무상의 지표만 갖고 재정적 부담을 판단하고 있어 급변하는 글로벌 경영환경 변화 속에 미래 투자에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지적도 이어진다.
재계 관계자는 “통상임금 소송은 법규정상의 공백을 빌미로 노사 간 합의된 사항이 쟁점화돼 ‘불로소득’ 성격의 추가소득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며 “산발적인 소송으로 노사간 갈등으로 경쟁력을 갉아먹고 통상임금에 대한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다가 미래 경쟁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