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아니스트 김주영] 작곡가이자 교육자였던 칼 오르프는 “연주는 감정 ‘표현’이 아니라 감정 ‘조절’임을 잊지 말라”고 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현명한 음악가가 지녀야 할 최후의 덕목은 예술가적 기질과 영감의 결과들을 잘 다스리고 통제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무대 위 그 원칙에 늘 깨어 있어야 하는 위치가 지휘자다. 작은 막대기로, 때로는 맨손으로 끊임없이 타인들을 다독이고 응원하고 끌고 가야 하는 ‘소리내지 않는 연주자’가 지닌 의무는 그로 집중된 박수갈채 이상으로 무겁고 크다.
40대 초반의 신예 지휘자 야닉 네제 세갱은 당당하게 개성있는 풍모를 드러내는 동시에 스스로의 책무도 해내고 있는 믿음직한 음악가다. 팽팽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바탕으로 명민한 템포 설정과 섬세한 리듬감, 다양한 조합의 앙상블을 심도있게 꿰뚫는 혜안을 지닌 이 비범한 지휘자는 자신의 기질을 자유롭게 발산하다가도 과도함의 선을 넘지 않는 균형감각을 지녔다. 작곡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재능은 어떤 곡이라도 이해하기 쉬운 메시지로 바꿔 청중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통해 훌륭히 나타난다.
캐나다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 로테르담 필, 음악감독 부임 예정인 뉴욕 메트 오페라 등이 네제 세갱에게 보이는 무한신뢰는 이번 내한 연주에서도 유감없이 증명되었다. 6월 7일과 8일 있었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7년만에 한국 공연은 네제 세갱이 2012년부터 친화력있는 리더십으로 조련해 온 미국 베테랑 오케스트라의 멋진 모습이었다.
8일 예술의전당 공연의 첫 곡은 리스트의 자유로운 구성의 교향시 ‘프로메테우스’였다. 인간에게 불을 가르쳐 준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박진감있는 극적 연출과 농염한 서정성을 통해 표현한 리스트의 다섯 번째 교향시는 네제 세갱의 섬세한 루바토와 아고긱 조절로 빛났다. 초기 낭만 시대에 걸맞는 스케일과 사운드의 마무리가 되는 프레이즈(악절)들을 매끄럽게 처리하는 세심함도 돋보였다. 1999년부터 오케스트라의 악장인 데이비드 김의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은 여유로운 음악적 표정과 가늘게 울리는 특유의 선율미, 노련한 기교와 함께 연주 중 바이올린 줄이 끊어진 돌발 상황으로도 기억될 만했다. 3악장에서 등장하는 강한 피치카토로 인해 악기에 이상이 생겼지만 지휘자는 눈빛으로 ‘계속하자’는 사인을 보냈고, 협연자는 줄을 갈아끼우는 대신 악장의 바이올린을 들고 연주에 몰입했다. 흔들림없이 완주한 데이비드 김에게 쏟아진 환호는 예상된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친숙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식상함이라는 형용사가 등장할 틈 없이 요리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데, 네제 세갱의 연출력은 35분간 이어지는 전곡 내내 청중들을 집중시켰다. 베토벤이 익숙한 이들에게는 과도하지 않은 음악적 서프라이즈를 제공했고, 예상을 살짝 깨는 템포 설정은 매 악장마다 기분 좋은 설렘을 만들었다. 작지만 단단한 자신의 몸 전체로 빚어내는 격렬한 지휘는 일견 마구 몰아붙이는 듯 보였지만 ‘필라델피아 사운드’ 로 대변되는 현악기의 매끄러운 질감도 충분히 발휘되며 전곡을 감싸고 도는 윤활유 역할을 멋지게 담당했다. 익숙한 명곡의 새로운 만남이자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