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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이정현 기자] “어이쿠.”
머리가 성성한 노구가 단발의 감탄사와 함께 무대에서 일어났다. 잿빛 낡은 코트를 입은 배우 최불암(78)이다. 몸을 들은 후 특유의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여까지 왔나. 날 부르던 소리는 다 어디로 갔나.”
연극 ‘바람 불어 별이 흔들릴 때’의 첫 장면이다. 최불암은 이 작품에서 자신이 외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한 노인을 연기했다. 뜻밖의 사고로 불구가 된 남편을 돌보는 여인, 10년 전 히말라야를 트래킹하다 겪은 사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청년, 회사에서 궁지에 몰려 자괴감에 빠진 직장인을 만나 이야기한다. “이 별은 너무 아프구나. 별은 하늘에만 있는 게 아니라 네 가슴에도 있어.”
최불암은 1993년 공연한 연극 ‘어느 아버지의 죽음’ 이후 25년 만에 무대에 섰다. 그는 17일 공연이 열리는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바람 불어 별이 흔들릴 때’의 전막을 공연한 후 “연기를 시작한지 59년이 됐는데 이제는 떨리기보다 혹시 실수할까, 무대에서 나가다 넘어질까 두렵더라”며 “실수한 대사가 있는데 눈치챘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넘어져 다치면 또 어때, 무대 위인데”
‘바람 불어 별이 흔들릴 때’는 세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의 삶은 고통이지만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존재 자체로 빛을 발하는 별이라고 강조한다. 최불암은 이 작품의 모태가 된 2016년 초연작 ‘아인슈타인의 별’을 보고난 후 “이런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라면 다시 무대에 서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고 무대로 돌아오는 계기가 됐다.
최불암은 “우리나라가 십여 년간 자살률 1위라는 신문 보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며 “우리 사회가 물질주의나 개인주의로 흘러가면서 우리의 삶을 공유하는 철학이 흐릿해진 탓이 아닐까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무얼 하든 충족하기 힘든 시대이지만 누구나 가슴 속에 별을 품은 존재라는 걸 이번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다”고 바랐다.
“내가 과연 작품을 소화할 수 있을까 걱정했습니다. 대사를 까먹지 않을까. 후배들에게 폐 끼치는 게 아닌가. 보름간 공연하는데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술 한잔 기울이고 싶은데 가능할 것인가. 부족한 연기력이 들킬까 걱정했네요. 그럼에도 무대에 돌아온다는 생각에 의지를 단단히 했습니다.”
◇“내 나이 80세, 마무리할 때 됐지.”
최불암은 2011년부터 출연하고 있는 KBS1 방송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 외에 방송활동이 없다. ‘바람 불어 별이 흔들릴 때’ 역시 SBS 드라마 ‘기분 좋은 날’ 이후 4년 만의 연기다. 여든을 바라보는 노 배우는 “이번 연극이 인생에 마지막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속으로는 천천히 정리를 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한다”며 “연기는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육체적으로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그만둬야 하지 않겠나”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최불암은 연극이라는 무대예술이 더 많이 사랑받기를 바랐다. 무대를 제2의 고향이라고도 했다. 자신을 ‘광대’라 표현하며 “연기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오랜만에 돌아온 무대를 향해 애정을 가득 보였다. 광대는 넓을 광(廣)에 큰 대(大)자를 쓴다며 “무언가를 풍자하고 알리는 게 광대의 역할이었고 목숨을 걸어야 한다. 나 역시 사명감으로 연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극쟁이의 한 명으로서 우리 청년들이 연극에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했으면 합니다. 극장에서 함께 울고 웃고, 사랑하고 즐기다 보면 행복에 가까워지지 않겠습니까. 예술로 삶의 의미를 다시 깨닫기를 바랍니다. 노구의 바람입니다.”
‘바람 불어 별이 흔들릴 때’는 18일 개막해 5월6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한다. 연극 ‘하나코’ ‘해무’의 김민정 작가의 창작극이다. 안경모 연출이 연출하며 최불암과 함께 진석 역에 문창완, 남편 역에 정찬훈, 준호 역에 이종무, 명수 역에 성열석, 아내 역에 주혜원, 윤희 역에 박혜영이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