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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캔버스라는 제도권의 틀 안으로 들어오면서 변화가 생겼다. 완벽한 안정감을 향한 강박과 성취에 대한 조급함은 화면 위에 세속적인 장식과 수많은 레이어를 쌓게 했다. 화려함이 더해질수록 화면 속 인물들은 고개를 돌렸고, 작가 본연의 순수한 마음은 등 돌린 형상들 뒤로 숨어버렸다. 외부의 시선에 기대어 쌓은 견고함은 결국 내부의 공허를 부를 뿐이었다.
‘공백’은 그 모든 소란을 비워낸 결과물이다. 작가는 “왜 그림을 그렸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품고 다시 초창기의 스케치북 앞으로 돌아갔다. 파란 볼펜으로 자신만의 낙서를 수없이 반복하며 찾아낸 담백한 선들. 그것이 이번 전시의 출발점이다.
이 선들을 왜곡 없이 캔버스에 옮기기 위해 홍현준이 택한 방식은 음각(Engraving) 드로잉이다. 물감을 쌓아 올리는 일반적인 페인팅의 관습을 거스르는 ‘마이너스의 미학’이다. 밑작업을 날카롭게 긁어내는 이 기법은 볼펜으로 종이를 짓누를 때 남던 물리적 압력과 깊이의 감각을 캔버스에 정확히 재현하고 영원히 각인하는 작업이다. 반복된 수행으로 정제된 선의 정수만을 화면 밖으로 돋보이도록 깊게 파고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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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곳곳에 등장하는 꽃의 형상은 작가가 오랫동안 다뤄온 십자가 구조를 변형한 조형 요소다. 가로와 세로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구조적 안정감 위에 곡선의 유연한 형태가 더해지면서, 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화면의 질서를 형성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는 작가가 내면을 관조하며 얻게 된 ‘유연한 안정감’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결과다.
화면 속 인물들의 태도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과거의 뒷모습이 자신을 응시하기 두려웠던 방어기제의 산물이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등을 보이는 인물도,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도 모두 자연스럽다. 시선의 방향과 관계없이 단단해진 작가의 자아가 이미 그 안에 흐르고 있다.
전시 제목 ‘공백화(空白花)’는 ‘공백을 그린 그림’이자 ‘공백에서 피어난 꽃’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품는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가 아니라, 덜어내고 비워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진실에 관한 기록이다. 처절하게 깎아낸 공허의 토양 위에서 작가의 본질이 꽃처럼 피어난 풍경이다.
정형섭 워크스워크스 대표는 “비워낸 자리에서 피어난 새로운 풍경, ‘공백’에서 홍현준의 현재를 만나보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시는 서울 강남구 학동로56길 43 지하 1층 워크스워크스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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