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 이끌고 ‘환상의 춤사위’

조선일보 기자I 2007.02.06 12:09:00

로잔발레콩쿠르 그랑프리 박세은 스토리
대회 직전 골반 통증 너무 아파 엉엉 울어… 주최측서 포기 권유도
동네 언니가 부러워 열살때 발레 입문

[조선일보 제공] 발레리나 박세은(18)양은 지난해 12월 서너 켤레의 토슈즈(toeshoes·발레리나가 신는 신발)를 사서 ‘어르고 달랬다’. 망치로 여기저기 두들겨 부드럽게 만드는 작업이다. 발과 토슈즈가 맞지 않으면 발레는 통증이고 리듬도 무너진다. 그중 가장 맘에 드는 딱 한 켤레를 골라 1월부터 하루 8시간씩 연습했다. 결승까지 함께 갈 토슈즈였다. 4일(현지시각) 스위스 로잔. 숨 죽인 관객을 향해 “그랑프리는 박, 세, 은!”이 호명됐다. 결승 무대에서 춤추기까지 그 토슈즈가 박양의 발을 감싸고 있었다. 한국 발레 역사를 새로 쓸 신데렐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불과 몇 분 후인 한국시각 5일 밤 2시40분. “아빠, 나 그랑프리야!” 전화벨이 울리기만 초조하게 기다리던 아버지 박효근(50·사업 준비 중)씨에게 세은양이 외쳤다.

10대 발레 무용수에게 로잔은 최고의 무대다. 발레학원 다니는 동네 언니가 부러워 열 살 때 시작한 발레로 8년 만에 꿈을 이룬 세은양은 “몸 상태가 나빠 큰 기대 안 했는데 진짜 좋아요”라고 했다.

발레는 연습 때 고통이 큰 예술이다. 지난달 22일 오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연습실에서 세은양은 울고 있었다. 골반이 아파서였다. 피겨스케이팅 스타 김연아가 다니는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았지만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출국 직전 발레리나는 “상 욕심 없다”고 했다. 준준결승을 앞두고 세은양은 어머니 최혜영(46·피아노학원 원장)씨에게 전화해 “너무 많이 아파”라며 울먹였다고 한다.

현지에서 독감과 편두통, 골반 통증에 시달리는 세은양을 보고 주최측은 출전 포기를 권했다. 그러나 “하게 해달라”며 출전을 강행, 마지막 차례로 순번을 바꿔 준준결승에 참여했다.

남자 7명, 여자 5명으로 압축된 결승 무대. 2위로 오른 박양은 “몸이 안 좋았지만 ‘라 바야데르’(고전 발레의 한 작품)의 감자티(주인공 배역의 이름)를 특히 만족스럽게 춘 것 같다”고 했고, 결국 일본 발레리나를 누르고 감격의 트로피를 안았다.

▲ 10대 발레리나는 미니 홈피에 올릴 사진이 필요한 것 같다. 최근 한 발레경연대회 참가 중 분장실에서 자신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박세은양.
갸름한 얼굴에 팔다리가 긴 발레리나 박세은은 집념 강한 노력파로 통한다. 서울 예원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예고에 진학한 2005년엔 동아무용콩쿠르에서 고교 1학년생으론 처음으로 금상을 받았다. 지도자들은 “축(軸)이 좋아 회전 동작이 정확하고 선이 깨끗하다”(예원학교 김나영), “신체의 아름다운 비율, ‘끼’에다 기술까지 두루 갖춘 재목”(한국예술종합학교 김선희)이라고 평했다.

로잔콩쿠르는 1985년 강수진이 동양인 최초로 입상한 무대고, 2005년엔 김유진이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은 김채리(17·선화예고)가 3위로 뽑혀 트로피 6개 중 두 개를 가져왔다. 장광열 무용평론가는 “박세은은 세계적인 발레단들이 주목하는 스타의 반열에 오른 셈”이라고 말했다.

“스물다섯까지만 발레하고 시집갔으면 좋겠다”고 했던 어머니 최씨는 5일 “아픈 몸으로 발레 하는 걸 보기 어려워서 한 말이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꿈을 펼쳤으면 하는 게 엄마 마음”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아픈 몸으로 스위스 로잔으로 가는 딸에게 홍삼액을 싸 보냈고, 결승까지 딸이 여러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철야 기도를 했다. 4일 콩쿠르는 끝났다. 박세은 미니홈피(http://www.cyworld.com/sesoon89)에 기분을 알리는 ‘Today is…’코너도 4일까지는 ‘아픔’이었는데 5일엔 ‘행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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