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가 낭독한 '조선왕의 로맨스' 들어보니…

지난 18일 서울 율곡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열린 ‘풍류음악회’ 리허설 모습. 해금 연주가 강은일이 악기를 켜고 있다(사진=한대욱 기자 doorim@).

[이데일리 양승준 기자] 지난 18일 서울 율곡로 창덕궁 후원. 연극배우 박정자가 군청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낙선재(樂善齋) 계단 앞에 섰다. “오늘은 낙선재가 간직하고 있는 사랑 얘기를 해드릴 참이다.”

박정자는 기품 있는 목소리로 조선 24대 왕인 헌종과 후궁 경빈 얘기를 꺼냈다. 계비 간택에서 첫눈에 반한 김씨를 마음에 품고도 홍씨를 아내로 맞이한 후 김씨를 잊지 못한 헌종. 이야기 도중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침향무’ 연주가 흘렀다. 헌종의 그리움이 섬세한 가야금 연주에 실려 안타까움이 더했다. 헌종은 23세의 나이에 요절해 빈으로 앉힌 김씨와 2년을 채 함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비극적인 결말. “기룬님 만날 길은 꿈길밖에 없어.” 박정자가 황진이의 시로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끝내자 해금연주자 강은일이 악기를 켜 애틋함의 여운을 이어갔다. 봄바람에 실린 아쟁소리에 박정자의 옷고름과 후원 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흔들렸다. 관람객들은 박정자의 낭독과 국악의 맛에 취해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이날 이 행사는 같은 곳에서 내달 5일부터 6월9일까지 매주 일요일 오전에 열릴 ‘풍류음악회’에서 맛볼 수 있는 내용 중 일부다. ‘풍류음악회’는 역사 속 이야기에 판소리 등 고전음악을 함께 즐길 수 있는 행사다. 박정자는 배우 정동환과 함께 ‘풍류음악회’에 이야기꾼으로 나선다.

‘풍류음악회’ 사전 리허설을 마친 박정자와 강은일 등은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다홍색 한복으로 봄기운을 낸 강은일은 “헌종과 경빈이 사랑을 나눴던 그 방에 들어가니 마치 그들의 사랑을 나눈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역사적 장소에서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음악과 함께하니 더욱 몰입이 잘 됐다는 말이다. 강은일은 “마치 입궁하는 기분이다”라며 설렘을 표하기도 했다.

황병기는 낙선재에 큰 의미를 뒀다. 그는 “낙선재는 단청이 없고 푸근하다”며 “때문에 가야금을 독주하기에 적당해 매력적인 장소”라고 말했다. 박정자는 창덕궁 속 추억을 꺼냈다. 그는 “창덕궁이 비원이라 불렸을 때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도시락을 싸서 문턱이 닳도록 찾던 곳”이라면서 “이런 곳에서 옛 사랑이야기를 함께 나눠 큰 선물로 다가왔다”며 미소를 지었다. 이문태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이사장은 “K팝 열풍이 불고 있는데 진정한 K컬처의 뿌리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행사의 의미를 강조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창덕궁 외에도 경복궁·덕수궁·종묘 등에서 ‘고궁에서 우리 음악 듣기’ 행사를 연다. 시작은 경복궁부터다. 경복궁 내 집옥재에서는 내달 4일부터 19일까지 토요일 오후 2시 궁중음악회가 열린다. 국립국악원의 연주와 춤이 곁들어진 궁중 연향을 중심으로 민속음악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덕수궁 함녕전에서는 내달 11일부터 6월 2일까지 토·일요일 오후 7시30분 퓨전국악과 ‘어린왕자’ 등 동화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공연을 선뵌다. 종묘 제궁에서는 내달 11일부터 6월 22일까지 ‘해설이 있는 종묘제례악’이 토요일 오전 10시에 시작된다. 02-580-3275.